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59 |
보스톤코리아 2016-12-22, 18:35:43 |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의 호화판 주택인 ‘금입택’들이 현재는 남아있지 않지만(김유신의 종가 ‘재매정택’의 터와 일부는 복원되어 전한다), 계속하여 그 주택의 명칭들로써 위치를 유추해 본다(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 제1장 참고, 김태식, 김영사). 이 금입택들 중에는 강가에 있었거나 강을 바라볼 수 있는 지역에 많이 있었다. 양상택楊上宅, 유야택柳也宅 그리고 누상택樓上宅 들은 버드나무가 많은 강가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양楊과 유柳는 버드나무를 뜻하기에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누상택은 집안에 누각이 있었기에 붙은 이름으로 강가에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많은 금입택들 중에는 사찰이나 관아에 붙었거나 가까이 위치한 경우도 볼 수 있다. 특정 사찰의 이름으로 지어진 주택으로는 남유택南維宅, 빈지택賓支宅, 한기택漢岐宅, 비혈택鼻穴宅, 판적택板積宅, 김양종택金楊宗宅, 사상택寺上宅, 임상택林上宅 등이 있다. 아울러 아남택衙南宅은 관아의 남쪽에 있었기에 붙혀진 이름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그 호화주택들의 명칭으로 위치를 유추해 보았다. 다음은 금입택의 이름으로 조경적인 면을 살펴본다. 양상택과 유야택은 집안에 버드나무를 심었거나 주위에 많은 버드나무가 둘러 쌓여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물론 버드나무들은 강가에서 자라는 나무이다. 누상택은 집에 큰 누각을 세웠기에 붙혀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지택池宅과 지상택池上宅은 집안에 큰 연못이 있었을 것이며, 상앵택上櫻宅과 하앵택下櫻宅은 집안에 많은 앵두나무를 심었거나 앵두나무군群을 중심으로 아래 위로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임상택林上宅의 경우는 청룡사 동쪽에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전한다. 그런데 청룡사의 위치를 알 수 없다. 현존하는 경북 예천의 청룡사는 후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문무왕 16년, 676년, 아주 작은 절이지만 귀중한 보물 두 점을 소장하고 있다. 424호인 석조여래좌상과 425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신라의 호화주택이었던 39채의 금입택들이 삼국유사에 이름만 전해오고 있지만 그 명칭들로 조경학적인 면도 상상해 볼 수 있다. 다음은 화랑세기에 나오는 세 채의 호화주택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삼국유사에 언급된 39채의 신라인들의 호화주택들 가운데 유일하게 수망택水望宅이란 집 한 채가 화랑세기에 나온다. 수망택의 소유자는 염장廉長(586~648)이었다. 염장은 지도태후知道太后와 천주天主 사이에서 태어났다. 지도태후는 진지왕의 정비였다. 진지왕은 폐위되고 나서 3년 후 죽었다. 그리고 지도는 진흥왕의 아들인 천주와 사통하여 염장을 낳았다. 천주의 어머니는 진흥왕의 후궁 월화궁주이다. 월화는 아버지가 가야의 이뇌왕이고 어머니는 신라의 양화공주이다. 염장은 자신보다 9세나 어린 15세 풍월주 김유신(595~673) 아래서 부제副弟로 있었다. 그리고 통례적으로 부제가 차기 풍월주가 되는데, 다음 16세 풍월주는 보종공에게로 넘어 갔다. 그리고 보종의 후임으로 17세 풍월주를 역임하였다(621~627). 그가 풍월주로 있을 때는 김춘추가 부제로 있었다. 그런데 재미나는 사실은 그가 화랑의 수장인 풍월주보다는 재물을 끌어 모으는데 관심이 더 많았었던것 같다. 그가 모은 재산이 거의 모두 보종공이 16세 풍월주로 역임할 때였다. 염장은 이름의 뜻과는 반대로 사취욕私取慾이 많았다. 그는 보종공이 16세 풍월주로 역임할 당시 보종의 집안일을 관리하면서 재물을 모았다. 당시 신라의 관행으로 용납되었는지 몰라도 염장은 막대한 재산을 사취하였다. 염장이 모은 재산의 규묘를 화랑세기에는 “당시 사람들이 공의 집을 가르켜 수망택水望宅이라 했는데 금金이 들어가는 모습이 홍수와 같다고 해서 이른 말이다” 라고 묘사되어 있다. 수망택은 단순히 물을 바라 볼 수 있는 지역에 건축된 주택이 아니라 아마도 화랑세기의 기록대로 금이 들어가는 모습이 홍수와 같기에 실제적인 물과 상관없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을 수도 있다. 이 금입택에 관하여 다른 기록은 없지만 금이 홍수와 같이 들어가려면 주택의 규묘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신라의 호화주택들을 금으로 치장했기에 ‘금입택’이라고 명명하였다지만 염장의 수망택처럼 금이 많이 들어갔기에 ‘금입택’이라고 명명하지 않았겠는가! 당시 호화주택의 소유자들이 과연 염장廉長의 이름처럼 모두가 청렴했을까? 아니면 염장의 마음처럼 재물을 탐욕했을까?(염장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7세 풍월주 편에서 다를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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