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인의 간절한 소망
보스톤코리아  2006-08-10, 00:07:59 
홍순영 (한미역사연구소 위원)


본국 KBS TV에서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1945년 서울>을 시청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해방을 맞은 감격도 가시기 전에 미소 양국의 힘의 논리에 의해 민족이 좌우로 분열되는 처절한 과정을 픽션으로 꾸민 드라마다.
드라마의 내용이 역사의 진실과는 전혀 다른 각도로 꾸며진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역할이 왜곡되어 유족들의 항의가 있다는 주장에는 나도 동의한다.
민족이 해방된지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10살 어린나이 초등학교 학생이었던 내 나이 어느덧 고희를 넘긴 늙은이가 되었으니 인생의 무상함을 다시 한 번 피부로 체험하는 느낌이 든다. 정신없이 고생만 하다 늙어버린 내 지금의 모습이 추하게 보이는 것 같다. 일제 식민지 하에서 태어난 열살박이 어린 나이에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모리스”발신법을 외우고, 퇴비용 풀을 베러 산과 들을 헤메면서 반공호를 파고 대죽창을 만들어 생전 보지도 못한 미군을 찔러 죽이겠다고 전쟁놀이에 매달려야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서 봐서는 않될 장면도 수없이 봤다.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 한답시고 진주한 소련군 “러스케”의 작폐(作幣)는 악독하기로 이름난 일본군에서도 보질 못했다.
처음 본 소련 여군들이 완전 나체를 드러내고 시내 남대천 개울가에서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물장구를 치고 목욕하는 장면을 봤을 때 느꼈던 야릇한 감정은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 이야기거리가 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술에 취한 소련군 러스케들이 시내 군청 앞 광장에서 구경나온 조선인을 총을 쏘아 죽인 잔악한 만행도 잊어지지 않는 아픔의 기억이다.
해방된 한국사회는 좌우로 편을 가르고 민족의 지도자들이 테러로 죽어갔다. 김구 선생이 남북 통일 정부안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이승만 박사의 단독 정부를 지지하는 세력 간의 대립은 해방된 조국을 혼란으로 몰아놓는 큰 원인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남한은 UN 한국임시 위원단의 승인과 감시 속에 국회의원을 뽑고 이승만이 주도하는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은 김일성이 주도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고 6.25 전쟁을 일으켜 4백 만명의 양민이 죽는 참상을 겪게 했다.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공산주의자 박헌영이나 이강국(최운혁)은 김일성이 6.25 전쟁 패배의 책임을 그들에게 뒤집어 씌워 미군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총살시켜 버린 인물들이다.
그밖에 등장인물 김수임(극증 김혜경)도 이강국을 도와준 간첩죄로 군법회의서 사형을 언도받아 처형되고 미군정 수도 경찰청장 장택상 씨도 역사 속에 이름만 남겨놓고 사라진 인물이 되었다.
우리 세대가 겪은 수난은 일제하에 태어나 해방, 미군정과 좌,우 대립,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여순 반란 사건, 제주 4.3 사건, 6.25, 4.19, 5.16 월남 파병, 유신, 10.26, 12.12, 광주 사태 등 사건을 다 겪으며 지켜본 세대라고 하지만 지금도 생존하면서 고난의 체험을 증언하고 있는 선배 참전 용사들에 눈가에 맺힌 눈물을 누가 닦아 줄려는지!
힘들고 험난한 세상을 살아 오면서 고생만 하고 늙은 것이 한(恨)스럽다는 말도 노병들 앞에선 가려서 해야 될 것 같다.
고생만 하고 꿈 많은 청춘이 없었다는 넋두리엔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전란을 피해 부산까지 내려가 학교를 다니면서 이웃 판자집 여학생과 심훈의 시와 괴테, 하이네, 로맹, 보르레스의 시(詩)를 _조렸던 피난 시절의 추억도 있다.
피난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룬 부산 거리엔 구걸로 연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술집이나 캬바레서 춤을 추며 향락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도 볼 수 있었던 것이 전시하의 부산이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황 속에서 부산 제 5 육군 병원엔 팔 다리가 짤린 부상병들이 연일 쏟아져 들어오는데도 국회의원이란 사람들은 군용 짚차를 타고 다니면서 밤낮없이 정쟁만 벌려대는 흉한 꼴도 봤다.
수난은 겪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에겐 과거를 돌아보는 역사가 있기에 자기 성찰의 기회도 된다.
일장기 히노마루를 바라보고 일본 국가와 일본 군가를 불렀던 우리에겐 반쪽이나마 조국 대한민국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민족인가!
청춘의 꽃도 피어나지 못하고 이름없는 나라 한국이란 작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어간 54,246명의 미군 전사자에게 우린 어떤 위로의 기도를 드려야 할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얼마전 보스톤 코리안지에 김월정 시인께서 쓴 한국전쟁 기념탑을 둘러본 감회의 글이 마음에 달아 옮겨본다.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한국을 위해 죽어간 미군 동상 앞에서 미안해요. 고마워요.의 눈물을 흘렸으나 정작 희생된 미군을 위해 촛불하나 밝혀 명복을 빌어준 일이 있었던가의 글은 우리 모두 뼈 아프게 새겨야 할 지적이었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른 나라, 현대차로 삼성 디지털로 국민 소득 2만불을 향해 달려가는 나라가 지난 날의 고마움을 잊고 한풀이의 과거사만 뒤적거리면서 반미를 외쳐야 되겠는가를 짚어봐야 한다.
6월이 지났다. 9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이 보스톤을 찜통으로 뜨겁게 달구고 있는 가운데 영겁의 세월은 소리없이 흐르고 있다. 피흘려 지켜온 내 조국, 미국 속의 한인 사회가 큰 뿌리를 내리고 자랑스런 민족으로 사는 것이 못난 노인의 간절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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