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22) |
보스톤코리아 2024-04-01, 11:31:11 |
566년(또는 567년)경, 신라의 여검객 유지柳枝는 많은 무리들을 모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러차례 소요를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그때마다 진압군을 보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결국 문노의 수제자 비보랑이 낭도들을 이끌고 가서 소탕하였다. 당시 18세인 비보는 유지의 은둔처를 찾아가서 그녀를 따르는 난도亂徒들을 모두 생포하였다(화랑세기에는 유지가 비보랑의 풍모에 반해 스스로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보는 재소요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무리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그런데 유지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 살기 보다는 비보를 따라가 죽기를 원했다. 비보는 하는 수 없이 유지를 집으로 데려와 첩으로 삼았다.477) 그들은 아들 유오랑을 낳았는데, 부모를 닮아 풍모가 맑고 빼어났다. 물론 격검술의 재능도 물려 받아 가히 겨룰자가 없었다. 그 역시 18세에 지명법사智明法師를 따라 진陳나라로 가서 무도를 연마하고 많은 책을 가지고 귀국하여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비보랑이 풍월주로 재임하고 있던 시기(582 ~ 585년)에 신라에는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배부르게 먹었고 잠시나마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제26대 진평왕은 579년7월 즉위하였다). 화랑도들은 그 모두가 풍월주 비보랑의 덕이 크다고 그를 칭송하였다. 그를 이어 10세 풍월주로 미생랑(미실의 동생)이 재임(585 ~ 588년)할 때는 가뭄이 들어 파종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되자, 낭도들은 욕심 많은 미생으로 인하여 나라에 흉년이 든다고 말들을 하였다. 그래서 진평왕은 반찬의 수를 줄이고 죄수들을 방면하였다. 그러자 몇년의 가뭄을 지나 비가내려 농사를 지을 수가 있었다. 비보랑이 풍월주로 있던 시기에는 나라는 풍년이 들었지만 화랑도 내부에는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550년에 태어난 미생은 천성적으로 욕심이 많아 낭도들로부터 인망을 받지 못했지만 권력을 잡은 미실의 비호하에 화랑도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생은 화랑도의 수장인 풍월주에는 오르지 못하다가 마침내 585년 비보랑을 이어 10세 풍월주가 되었다. 그의 나이 36세가 지나가고 있었으니 상당히 늦은 나이에 화랑도의 수장이 되었다. 비보랑을 이어서 차기 풍월주가 될 자질과 소양을 갖춘 대세大世가 있었지만, 그는 비보랑의 종제라는 인척관계를 이유로 풍월주의 자리에서 배제되었다. 그것은 명목상이고 실직적으로는 미생파와의 세력다툼에서 밀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478) 그래서 비보랑은 585년 풍월주의 위位를 물러나면서 미생에게 대세를 부탁하였다. 미생은 취임과 동시에 대세를 전방대화랑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그 자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미생은 대세가 주색을 탐하고 난폭한 언행을 일삼는다며 그를 해임하고 제문랑諸文郞에게 그 직책을 주었다. 제문은 미생의 첩의 동생이었다. 대세는 이에 화가나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인 화랑 구칠仇漆과 함께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갔다. 그후 그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떠나자 낭도들은 술렁거렸고 상선이 된 비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랑도는 분파의 조짐이 나타났다. 이에 비보는 자신의 수하 낭도들로 인하여 야기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상선의 위에서 물러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문노는 선도仙道의 우두머리는 둘(문노와 비보) 밖에 남지 않았는데 비보가 물러나면 화랑도의 조직이 와해된다면서 만류하였다. 상선들이 개입하여 조율한 조직의 개혁은 제문랑을 전방대화랑에서 해임하고, 비보와 덕명공주의 장남 붕부朋夫를 그 자리에 기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낭도들 사이에서는 가뭄과 흉년이 미생의 욕심때문이라는 흉흉한 뒷담화가 끊어지질 않았다. 결국 미생은 낭도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고, 588년 풍월주의 위位에서 물러났다. 차기 11세 풍월주는 미실의 장남 하종이 이어 받았다. 하종은 선정仙政(화랑의 제반업무)을 모두 미실에게 물어서 결정했다. 미생이 풍월주 재임시 낭도들은 크게 5개 분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미실은 조직의 대의大議를 모으기 위해 상선上仙(전임 풍월주)과 상화上花(전방 및 좌우대화랑)를 화합하여 열선각列仙閣을 만들어 조직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그의 일환으로 미실은 비보랑이 추천한 많은 화랑들을 뽑았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김보리(4세 풍월주 이화랑의 아들, 화랑세기의 편찬자 김대문의 증조), 김서현(김유신의 아버지), 김용춘(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 등이다. 477) 비보랑은 세진(노리부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들 세호랑細好郞과 딸 세미와 세신을 낳았다. 부인 세진은 곧 사망했다. 그리고 다시 덕명공주(진흥왕과 가야국의 월화공주 딸)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들은 5남(붕부, 보부, 석부, 보주, 진주) 3녀(홍주, 녹주, 명주)를 두었다. 비보에게는 서자 유오랑, 유매, 가기, 수동 등이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유지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오랑은 ‘신라 제일의 여검객’ 유지의 아들이다. 478) 법흥왕에게는 당시 가장 아름다웠다고 기록된 후궁 벽화의 딸 삼엽공주가 있었다. 삼엽공주는 아시공과 결혼하여 아들 미진부(미실과 미생의 아버지이다)와 딸 말보(거칠부의 부인으로 문노의 부인이 된 윤궁을 낳았다), 실보(법흥왕과 후궁 옥진의 아들인 비대의 부인이다), 그리고 골보(동대의 부인이 되어 대세를 낳았다)를 두었다. 비보는 비대의 아들이고, 대세는 동대의 아들이니 비대와 대세는 서로 이종사촌이고, 미실/미생 남매와는 내외종간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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