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17) |
보스톤코리아 2024-02-26, 11:24:06 |
8세 풍월주를 역임한 문노는 격검술이 가히 신기에 달했다. 더불어 문장에도 능했으며, 부하 낭도들 아끼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했다. 그는 청탁에 구애되지 않았고, 자기 문하에 들어와 무도를 수련하겠다는 자는 신분의 상하를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드려 그의 ‘비술’을 전수하였다. 그러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고, 낭도들은 죽음으로써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로써 사풍士風이 크게 일어나 꽃피었고, 삼한의 통일 대업이 문노로부터 싹트지 않음이 없었다고 화랑세기는 기록하고 있다. 문노는 3년간 풍월주에 재임하는 동안 화랑도의 조직을 대폭 개편하여 잘 갖추어진 제도로 낭도들을 이끌었다. 8세 풍월주 문노조의 기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공(문노)의 때에 낭도의 부곡部曲을 두었다. 좌우봉사랑左右奉事郞을 좌우대화랑左右大花郞으로 만들고, 전방봉사랑前方奉事郞을 전방대화랑前方大花郞으로 만들어서 각기 3부部의 낭도를 거느리게 했다. 또 진골眞骨화랑, 귀방貴方화랑, 귀문貴門화랑, 별방別方화랑, 별문別門화랑을 두었고, 12 ~ 13살의 빼어난 진골眞骨 및 대족大族과 거문巨門의 자제로서 속하기를 원하는 자로써 이를 삼았다. 좌화랑 2인, 우화랑 2인을 두었으며 각기 소화랑小花郞 3인, 묘화랑妙花郞 7인을 거느렸다. 좌삼부左三部는 도의道義, 문사文事, 무사武事를 맡았고, 우삼부右三部는 현묘玄妙, 악사樂事, 예사藝事를 맡았고, 전삼부前三部는 유화遊花, 제사祭事, 공사供事를 맡았다. 이에 제도가 찬연히 갖추어졌다.> 문노는 화랑의 제도, 즉 자신이 이끌던 호국선 낭도들과 설화랑의 운상인 낭도들을 통합한 후 그에 적합한 조직으로 재개편하여 낭도들의 사기를 북돋우었고, 조직의 위상을 높혔다. 무엇보다도 문노는 풍월주 재임시 결혼을 하여 골품을 얻었다. 문노는 어머니가 가야인(조공으로 바쳐진 야국녀의 딸)이어서 골품이 없었다. 어쨌든 그는 마흔이 다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국 풍월주가 된 후 윤궁을 아내로 맞이하여 골품을 얻었다(진골이 되었다). 윤궁은 거칠부(김황종)의 딸인데, 일찍이 미실과 함께 동륜태자를 섬겼다. 윤궁은 동륜태자의 딸 윤실공주를 낳았고, 미실은 동륜의 딸 애송공주를 낳았다(진흥왕은 애송을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하였다). 윤궁과 미실은 내외종간이다.473) 572년3월 동륜이 보명궁주(진흥왕의 후궁)의 치맛폭을 풀려고 담장을 넘다가 개에게 물려서 죽는 사건으로 인하여 윤궁은 약 5년간 과부로 살다가 문노와 결혼하였다. 문노는 576년 풍월주에 올랐다(부제는 비보랑이었는데, 비보는 윤궁과 이종사촌간이고 미실과는 내외종간이다). 잠시 시간을 앞으로 돌려서 그들이 맺어진 뒷담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575년 무렵, 세종과 문노는 출정에서 돌아왔다(그들은 십대 때부터 김무력, 이사부 등 대장군 휘하에서 변방을 돌며 국토를 확장하고 삼한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세종에게는 사랑하는 부인 미실과 가족이 있었지만, 마흔이 다 된 문노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그래서 세종이 미실에게 혹시 좋은 혼처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미실은 자신의 고종사촌동생 윤궁과 궁합이 잘 맞을 것같은데 다만 문노의 신분을 염려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윤궁은 미실의 권유에 따라 문노만 좋다면 그의 위품位品(골품)에 관계없이 혼인할 의사를 전달하였다. 이에 비보랑도 ‘중매’에 가담하여 ‘당당한 풍월주의 위풍과 신기에 달하는 격검술의 명성을 날리며 고매한 인품까지 겸비한 문노를 놓치지 말라’고 훈수를 들었다. 그러나 윤궁은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할 몇가지 문제점을 비보랑에게 털어놓았다. 문노의 신분이 낮으니 자신의 딸 윤실과 모녀의 관계를 끊는 것이 첫째이고, 두 번째 역시 문노의 신분 때문에 관계를 끊는 것인데 (화랑세기에) 탈자가 되어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문맥상 친척과 친지들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는 진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거절하고 다른데로 가는 것을 염려하였고(진종은 지증왕의 아들, 즉 법흥왕의 동생이다. 당시 그는 예순이 넘기고 있었다. 윤궁은 동륜태자와 사별 후 진종에게 색공을 하고 있었다), 네 번째는 아버지(거칠부)가 늘 귀한 사람(진골의 신분)에게 시집보내려 한 것을 거부한 것과 마지막으로 금태자(진지왕, 576년 즉위)가 형(동륜태자)의 총애를 이으려고 했는데, 다른데로 가는 것이라며 이 다섯 가지가 풀리면 문노에게 시집 갈 것이라고 하였다. 윤궁의 심경을 들은 비보랑은 문노에게로 가서 전하니, 문노는 윤궁의 말이 옳다면서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문노의 나이 마흔살 무렵, 그때 까지 수 많은 여인들이 그를 흠모하며 따랐지만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가 과부인 윤궁과의 혼담을 흔쾌히 받아드린 연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받아온 부당한 차별을 극복함과 동시에 자신이 품어온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었으리라…. 473) 아시공은 법흥왕의 딸 삼엽공주와 결혼하였다. 그들은 아들 미진부(2세 풍월주)와 딸 실보와 말보를 낳았다. 미진부는 묘도를 아내로 맞아 미실과 미생을 낳았다. 실보는 비대전군(부모는 법흥왕과 옥진이다)의 부인이 되어 9세 풍월주 비보를 낳았다. 말보는 거칠부의 부인이 되어 아들 윤황과 딸 윤궁, 윤옥을 낳았다. 이러한 인맥姻脈으로 인하여 미실과 윤궁은 내외종간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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