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회가 견고하게 복음주의 세력으로 정착해 감에 따라, 영국의 감리교회가 세속화의 정점에 있었던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영국을 건졌다는 평가를 얻게 된다. 데이빗 마틴(David Martin)도 지적한 바와 같이, 감리교회는 영국이 유혈혁명을 거치지 않고 영국 사회를 도리어 신앙으로 일치하게 한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여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세속화 파고에 대항하여 이기게 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아가서 감리교회의 설립으로 성공회 안에서도 성경의 원리와 실천을 중시하는 복음주의 진영이 자리를 잡게 되었고, 그러한 결과로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를 중심으로 클래팜파 (Clapham Sect)의 주도로 노예무역의 종지부를 고하게 되고, 도덕적 경건성과 노동의 신성성이 강조되는 기독교 윤리가 세워짐으로 이점이 빅토리아 재위시 영국의 위대성의 핵심으로 평가된 것이다. 복음주의는 18세기 계몽주의의 세속화된 역동성에 대항하는 힘이 되었고, 일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적어도 영국 사회를 신앙을 중심으로 엮어 준 구심점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이다. 이 기간은 통상 1840년 이후를 지칭하며 복음주의의 약진과 더불어 종교 개혁이후 새롭게 진입한 천주교회가 이제는 영국 사회에서 월등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세속화와 부흥운동 이 두개의 사조를 동시에 보려면, 교회의 출석을 보는 것이 중요한 도움이 된다. 1851년도에 실행된 인구조사에 의하면, 잉글랜드와 웨일즈는 39%로 당시의 미국의 교회 출석률과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일차세계대전 전까지 인구 증가율이 오른 것처럼 약간의 변동을 가지고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두개의 세계대전의 진통을 겪은 뒤에, 1940년대의 예외적 기간을 빼고는 교회 출석률은 계속되는 하강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1979년에 이르러서는 교회 출석률은 11.7%가 되었고, 1998년에 7.5%까지 출석률이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통계들은 교회들이 쇠퇴하기에 주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교회의 감소율이 증가하고 있다는데 더 큰 경고가 되는 것이다.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교회의 제적률이 가장 정점에 있었던 시기는 1904년이며, 스코틀랜드는 1905년으로 나타났다. 그 이후 40년동안 지속적인 쇠퇴가 있었고, 다시 1956년 스코틀랜드, 1959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즈에 교회의 제적률이 정점에 이르게 되었다. 1959년의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수치는 1904년의 경우보다 11 % 낮게 나타났으며, 1956년의 스코틀랜드는 1990년의 경우보다 6% 낮게 나타난 것이지만 사실은 20세기 초반을 제외하면 최고의 수치를 보여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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