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34 |
화랑세기花郞世紀, 8세 풍월주風月主 문노文弩(24) |
보스톤코리아 2018-07-16, 10:14:44 |
세종은 엄처시하에서 살아온 무능한 공처가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분명 그는 풍월주로서의 용맹함을 떨치며 아버지 이사부와 김무덕 등의 유능한 장군들을 보좌하며 휘하의 화랑도들을 거느리고 진흥왕의 영토확장 정책에 많은 공을 세웠다. 뿐만아니라 신라 천년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격검술의 보유자 문노가 목숨과 함께 맹세한 충성심은 세종에게는 든든한 후원자였으며 동반자였다. 세종은 인의仁義와 관용을 바탕으로 휘하의 낭도들을 이끌었다. 그는 부인 미실이 색공과 색사로 진흥왕을 비롯한 여러 남자들을 상대하였지만 늘 미실을 사랑하고 아꼈으며, 미실의 의견에 거의 ‘복종’하였다. 한편 문노는 세종을 존경하며 따르고 충성을 다하였지만 미실은 좋아하지 않았다. 나중에 윤궁과 결혼한 후 윤궁의 조언으로 문노는 미실의 행위를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받아들이기엔 많이 주저하였다. 문노도 결혼을 하고 난 뒤에는 모든 일들을 부인인 윤궁에게 물어서 처리하였다. 물론 윤궁은 화랑의 선모였다. 하지만 천하 제일의 기상을 떨치며 신기의 격검술로 전장을 누비던 문노가 부인의 치맛폭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것 같아서 낭도들은 기상을 잃었다며 직언도 서슴치 않았다. 이에 문노는 자신도 미혼일 때는 세종을 그렇게 본 적이 없지 않았는데 자신이 결혼을 하고 보니 세종을 이해하다면서 너희들도 결혼을 해보면 알것이라며 스스로 ‘공처가’ 임을 부인하지 않았던 애처가였다. 문노는 진지왕의 폐립에 세운 공으로 선화仙花(풍월주)가 되었다. 여기에는 윤궁의 힘이 또한 컸다. 그리고 그 거사의 공으로 문노는 아찬(6등급, 아찬은 6두품으로서 승진할 수 있는 최고위직이다)으로 승진되었으며 마침내 골품도 얻었다. 문노는 자신의 공적으로 아찬의 벼슬을 얻었고 윤궁과 결혼하여 골품도 얻었다. 6두품의 신분으로 닿을 수 있는 최고위직이지만 아찬으로의 승진은 신분의 상승을 의미한다. 즉 그가 6두품의 신분으로 최고위직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진골이 되면서 승진한 것이다. 진골의 신분으로 상승한 문노의 가문은 후일 그의 막내 아들 금강이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등극하면서 상대등으로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화랑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공은 대강을 낳고 나서 사사로운 정의 진실됨을 더욱 크게 느끼고, 모든 일을 번번이 윤궁에게 물어서 행했다. 혹 옳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초년의 기상이 없어졌다” 했다. 공이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나도 지난날 세종전군이 궁주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을 보고 흉을 보았는데, 내가 스스로 그렇게 되고 보니 알겠구나. 너희들 또한 스스로 당하면 알 것이다” 하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공이 진지왕을 폐립하는 데 참여한 공으로 선화가 되기에 이르러 비로소 골품을 얻었다. 윤궁이 기뻐 말하기를 “그대가 지아비가 될 날이 멀지 않습니다” 했다.] 문노와 윤궁은 신궁에서 결혼하였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신라의 왕들은 ‘살아 있는 신’ 이다. 신라는 상대上代로 부터 도교, 유교의 신앙체계가 있었고 나중에 불교가 들어와서 융성한 발전이 있었지만 왕들은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되었다. 그들은 살아서 신이었으니 죽어서도 당연히 신이다. 그리고 그들은 신궁에 봉안되었다. 그들은 신라를 신들이 사는 신국이라 불렀으며 이 신국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이 바로 포석사와 신궁이다. 이 신궁에서 문노와 윤궁이 결혼식을 올렸다. 화랑세기에는 네 쌍의 결혼식이 신궁에서 올려졌음이 기록되어 있다. 모두 진골 이상의 신분이다. 다만 모든 성골/진골의 결혼식이 신궁에서 치루어졌는지 아니면 일부만 행해졌는지의 기록은 없기에 어느 범위에서 행해졌는지의 추측은 쉽지않다. 그리고 또한 이 신궁에는 왕이 아닌 영웅/영걸의 화상도 모셔져 있었다. 신라의 대영웅/영걸들이라면 세종의 아버지이며 지소태후(진흥왕의 어머니)의 남편 태종(이사부)과 문노, 그리고 황종과 김유신 등이다. 그리고 화랑세기의 기록으로는 태종과 문노의 화상이 모셔져 있었다. 신국神國 신라新羅의 신궁神宮은 무엇인가? 신궁은 신이나 신들을 모셔놓고 배향하는 곳임은 분명한데 누구를 모셨으며 누가 주신主神이었을까? 그런데 먼저 여기서 세밀히 관찰해야 할 부분은 화랑세기를 함께 읽으면서 연구한 신궁과 삼국사기(또는 삼국유사도 포함)에 기록된 신궁만을 볼때는 그 개념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아울러 삼국사기에서는 그 설치연대를 상이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 곳에서는 소지왕(제21대, 재위 479 ~ 500년)대로 다른 한 곳에서는 지증왕(제22대, 500 ~ 514년)대로 기록되어 있다. 약 650년이나 지나서 완성된 삼국사기 집필진의 눈에는 두 왕조의 35년이 큰 격차는 아닐 수도 있다(1145년 삼국사기 완성).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나무위키,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www.gch.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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