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족과 신라, 가야의 친연성 (4) |
보스톤코리아 2014-12-15, 12:17:59 |
고대 북방 유목민들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도 이생과 똑같은 후생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고인이 생전에 사용하던 물품을 시신과 함께 부장했고 생전에 부리던 노비나 시녀들을 순장시켰다. 우리나라도 고조선 때 순장의 흔적이 있고, 위지동이전에 이르기를 부여에는 대규모로 순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반도에는 신라와 가야에서 순장 풍습이 있었는데, 신라의 경우는 지증왕(AD 501~AD 514) 때에 순장을 법으로 금했지만 도성에서 떨어진 지방에서까지 순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닌 듯 싶다. 신라와 가야의 순장이 흉노식 묘제인 적석목곽분이나 목곽분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순장 풍습이 북방 흉노인들이나 부여로부터 물려받은 풍속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금관가야 왕족들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김해 대성동 13호분의 경우는 왕의 상징물, 위세품인 파형동기가 6점, 통형동기 3점이 출토되어 왕의 무덤이 확실한데, 3사람 순장자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대성동 1호분에서는 5명의 순장자가 나왔고 말머리로 짐작되는 뼈가 발견되어 가야에서도 흉노처럼 생전에 타고 다니던 말을 순장했다고 짐작되는데, 경주 천마총에서도 말을 순장한 흔적이 보인다. 흉노의 후손인 몽골 칭기스칸 시절에는 대칸의 장례식 때 말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순장하곤 하였다.
대가야의 수도 고령 지산동 44호분에는 무려 32명의 순장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황남대총 남분에는 60대의 남자가 피장자인데 15세 정도의 여성이 순장되어 있었다. 그외에 양산 부부총, 영덕 괴시동, 의성탑리, 함안 말산리, 합천옥전 고분, 성주 성산동, 부산 복천동 등 경상도에 걸쳐 많은 순장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유럽의 사학자들 중에는 훈족의 원류로 투르크 계를 지목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훈족과 투르크 계 사람들은 매장 방법이 아주 다르다. 훈족, 흉노, 몰골과 한민족은 시신을 매장하지만 투르크인들은 화장을 하기 때문에 훈족의 원류가 될 수 없다. 김해 대성동 무덤군은 금관가야 김씨 왕족들의 무덤으로 지목되어 왔다. 3세기 말까지는 대성동 무덤군에는 순장이 없었는데 3세기 말부터 순장 무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3세기 말경에 순장 문화를 가지고 있던 북방 유목민족들이나 부여인들이 김해 지역에 들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누구? 앞으로 연구 과제가 될 수 있는 사안이다. 대성동 57호분은 아주 이색적인 고분이다. 57호분에 매장된 묘주의 발치 쪽에 20~30대 여성 3명이 나란히 가로 방향으로 누워 있는데, 이들은 묘주를 따라 죽은 순장자들이다. 이들의 머리 맡에서는 5개의 철제 투구와 갑옷들이 발견되었고 여자들의 다리 근육이 발달한 것으로 미루어 여자 전사로 생각되어 진다. 57호분은 4세기 후반의 무덤이었다. 서기 400년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이 5만의 군사를 남정(南征) 시켜 신라와 연합해서 가야, 왜 연합군을 종발성(지금의 동래 복천동?)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가야와 같은 작은 나라가 고구려 같은 대국과 싸우려면 여자들도 힘을 합쳐 전투에 참여하여야 했을 것이다. <편두: Cranial Deformation> 편두는 어린애가 태어나면 눕혀 놓은 상태에서 이마를 돌로 눌러 이마와 뒷머리를 평평하게 만든 머리 형태를 말한다. 몽골에서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훈족의 이동경로 곳곳에 있는 분묘에서 머리의 이마와 관자놀이가 눌려 있고 머리통이 긴 편두가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훈족에게 편두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훈족의 원류로 생각되는 흉노족들은 편두 풍습이 없다.
동이위지전에 진한(신라) 사람들은 모두 편두였다는 기록이 있고 가야의 경우에는 김해 예안리 고분 발굴에서 수습한 190구 인골 중에 10구가 편두를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4세기 경에 건조된 북방 유목민들의 묘제인 목곽묘에서 발견되었다. 가야의 경우 5세기 이후에 형성된 분묘에는 편두를 발견할 수 없었다. 신라의 최치원은 신라국사 자증대사의 공덕비에 법흥왕(514~540)이 편두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토용 기마인물상의 말 탄 기사 역시 편두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문화재를 선택한다면 신라 금관이 꼭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이 신라 금관의 머리테 길이가 평균 53.4cm에 불과하다. 참고로 현재 한국 성인들의 머리둘레는 57.5cm로 신라 금관보다 4cm를 상회한다. 그렇다면 신라 왕이나 왕후는 머리테 길이가 아주 적은 신라 금관을 어떻게 머리에 썼을까? 그들 왕이나 왕후가 편두를 가지고 있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편두는 동이족들의 보편적인 특성이었다. 하지만 5세기 이후에는 편두 풍습이 사라지게 된다. 편두 관습은 이집트, 북아메리카 인디언, 동북아, 인도, 시베리아, 마야 문명에 있었던 풍습이었다. 고조선 때도 편두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에는 편두 풍습이 없었다. 편두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마야 사람들은 뱀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편두를 해서 뱀의 머리처럼 만들려고 시도했다고 한다. 두번째로는 고대 샤만, 여사제, 무녀 등이 특수한 신분을 만들려고 시도했고, 세번째는 미용 성형을 목적으로 했다는 설이 있다. 편두를 하면 콧날이 오똑 서기 때문이라는데, 고대의 미인 기준이 현대처럼 오똑 선 콧날이라는 증거는 없는 것이다. 김해 예안리의 경우는 편두를 가지고 있는 인골이 가난한 여인들이 많고(부장품이 없었다), 비슷한 처지의 여인들이 함께 편두를 한 점으로 미루어 공동체가 함께 편두를 함으로써 가족과 집단의 행복과 번영을 염원했다는 가설도 있다. 아시아에서 인도를 제외하고는 그리 흔치 않은 편두 풍습을 신라, 가야와 훈족이 공유한 것은 또 한 번 그들간의 친연성을 확인하는 항목이 될 것이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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