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이후 최악의 잔학한 사건 |
보스톤코리아 2006-06-10, 02:40:17 |
▶사진설명(상) : 합참의장 Peter Pace 미 해병대 대장이 한 쇼에 출연, 현재 수사중인 하디타 사건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말하고 있다.
▶사진설명(하) : 학살 후 시체 수습장면 이라크의 여인과 아이들이 미 해병대에 의하여 학살되었다. 하디타 학살 진상은? 이 글은 영국의 Sunday Herald 6월 4일 자 에 보도된 Neil Mackay 기자의 글입니다. 대부분의 미국언론들은 현장에서 직접 취재한 기사를 보도하기 보다는 군 당국의 조사발표와 AP 등의 통신사 자료를 토대로 보도하는 경향이 있어 실제 상황을 사실적으로 경험하기 힘든 실정입니다. 이글은 현장을 사실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사라 생각돼 싣습니다. 윤희경 박사께서 번역한 글을 그대로 옮김니다. [편집자] 하디타 수력댐에 주둔한 미 해병대 제 1여단 제 3대대에 배속된 민간인들은 이 기지를 야성적 이라고 표현한다. 중대원들은 목욕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정규 숙소 대신 해골과 십자표 뼈 마크를 건 임시 막사에 기거한다. 악취가 난다. 이 수력발전소를 돌리는 미 민간 토목기사는 자기와 같이 기거하는 군인들에 대하여 공포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킬로 중대는 미해병대 제1여단 3대대에 소속되어 있다. 작년 11월 19일 아침 7시 15분경 킬로중대의 험비(무장한 장갑차) 4대가 하디타시의 한 거리를 지나고 있을때 폭탄이 터저 이 대열의 마지막에 있던 험비의 운전병인 병장 테라자스가 사망하였다. 곧 이어서 일어난 일은 월남전쟁 중 미군이 베트남 양민 500명을, 주로 아이와 여자, 그리고 노인들, 사살한 마이라이학살 이래 미군 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폭발 직후 잔여 13명의 해병대원들은 피바다를 이룬 광포한 난행을 자행하였다. 즉 일가족을 몰살하고, 여자와 아이들과 심지어 휠췌어에 앉아 있던 노인을 사살하고, 주택가에 수류탄을 투척한 것이다. 모두 24명의 이라크 민간인들이 이 해병대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해병대는 하디타학살에 대하여 허위진술과 사실 은폐를 즉각 시작하였다. 이 학살에 대한 허위 진술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택시 한대가 험비대열로 다가 오기에 해병대원들이 손짓으로 정지하라고 지시했다. 험비와 택시가 정지하자 폭탄이 터졌다. 이 택시는 험비를 폭탄이 매몰된 위치로 유인했거나, 혹은 택시의 탑승자가 폭탄을 터트렸다. 일단 폭탄이 터지자 인근 주택에서 자기들을 향하여 총격이 시작되었다. 택시 안의 4명과 운전사가 도주하기에 모두 사살하였다. 그리고 해병대원들은 자기들에게 사격을 가한 위치로 대응사격하여 8명의 폭도를 사살하였다. 그리고 15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하였는데 이는 험비의 운전병 타라자스를 희생시킨 폭탄의 폭발에 기인한 것이다.” 미군의 조사, 생존자의 증언, 그리고 인권옹호단체와 의료진의 보고서에 의하면 위의 진술에는 진실이라고는 거의 없다. 9살난 여자아이인 이만은 폭발지점으로 부터 도보로 몇분 안되는 곳인 할아버지 알리 집에 있었다. 89세인 알리는 다리가 없어 휠체어를 탄다. “우리는 큰 폭발음으로 모두 깨어 났다. 폭발이 나면 우리가 늘 하는 것처럼 아버지는 가족을 보호하여 주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하려고 코란을 갖고 자기 방으로 갔다. 아버지가 기도할 때, 이만과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두 남동생, 두 고모는 큰방에 모였다.” 파자마를 입은 이만은 해병대가 집 가까이 오면서 총성을 들었다. “그들이 집안으로 들어 닥치며 아버지의 방으로 가 그를 사살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어요.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어요. 단지 총구만이 문안으로 들어 왔어요. 할아버지에게 총질을 먼저 했어요. 가슴에 그리고 머리에. 그리고 할머니를 죽였어요. 그리고는 나와 8살짜리 남동생을 둘러 싸고 있는 어른들이 있는 방 구석에 자동소총을 막 쏘았어요. 나와 내동생은 부상 당하였으나 살아 남았어요” 이만의 고모는 총격이 시작되자 5개월 짜리 조카를 안고 도망쳤으나 그 남편은 피신 중 머리에 총을 맞아 죽었다. 모두 7명의 가족이 죽었다. 이만의 할아버지는 9발을 맞았다. 그의 사망증명서에는 내장이 등뒤로 삐져 나왔다고 되어 있다. 이 집안에서 어른은 단 한명만 살아 남았다. 이만과 남동생은 침대 밑에 2시간 동안 숨어 있다가 이라크군인에게 구출됐다. 해병대원들은 다음에 6명의 자녀를 둔 유니스 집으로 갔다. 부인인 아이다는 수술후 요양중이라 그의 자매가 와서 집안 일을 도와 주고 있었다. 이웃에 의하면 유니스는 해병대원에게 영어로 “I am a friend, I am good.” 라고 하며 살려줄 것을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사살하였다. 이 집에서 그날 12살 짜리 여자 아이만 빼놓고 모두 8명이 죽었다. 14살, 10살, 5살, 3살, 그리고 1살 짜리가 사살되었다. 생존한 사파는 땅바닥에 업어져 그의 형제의 피를 덮어 쓰고 죽은 것처럼 가장하여 살아 남았다고 한다. “나는 당시에는 살기를 바랐는데 지금은 가족들과 죽었었으면 한다”고 사파는 말하고 있다. 길 윗쪽 한 집에는 20세 부터 38세 까지 4형제가 같이 살고 있었다. 미군은 이 집의 아낙네들을 모두 집밖으로 쫓아 내고는 4형제를 모두 죽였다. 마지막 학살은 처음 폭탄이 터진 곳에서 일어 났다. 한 택시가 이 위치로 다가 오자 해병대원이 정지 시키고, 택시 안에 있던 4명의 학생과 운전사를 끌어 낸 후 사살하였다. 사살된 24명중 단 한 명 만이 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학살이 끝난 후 해병대원은 이 지역을 차단하고 사망자를 백에 넣고 하디타병원의 뜰에 내려 놓고는 돌아 갔다. 타벳이라는 이라크의 한 학생이 병원 시체실에 있는 사망자들과 사살현장을 촬영하고 그 테이프를 이라크의 한 인권옹호단체에 보냈다. 이 단체는 사망원인은 미군 운전병 타라자스가 죽은 폭탄이 아니고 사망한 병장에 분노한 미군 동료들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병원의 한 의사는 폭탄의 파편으로 인한 상처는 없었고 총상인 것은 분명하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가슴과 머리에 근거리 총격을 입었다.” 이라크 민간인들의 사망증명서에는 모두가 총상으로 그리고 상당수가 가슴과 머리에 총상을 입었다고 되어있다. 학살 현장과 시체를 수습한 해병대원 브리오네스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 병사는 “사망자는 유아로 부터 성인 남자와 여자에 걸처 있었고, 목격한 것을 뇌리에서 결코 지워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그 피 냄새가 나고 있다. 이 일은 내 뇌리와 심장에 무엇인가를 새겨 놓았다” 라고 하고 있다. 하디타의 시장과 원로들이 학살에 대해 지역 해병사령관에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학살은 사고였다고 답하며 항의가 무시되었다. 비데오 테이프도 제시되었으나 군 당국은 테이프는 알카에다의 선전물이라고 치부하였다. 그러나 민간인들이 미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것이 분명하여지자 해병대는 말을 바꾸어 이라크 폭도들이 이 민간인들을 자신들의 방패로 썼기 때문이라고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바그다드의 미군 고위사령관들이 그 테이프롤 보고 나서야 산산 조각이 났고, 범죄수사가 시작되었다. 군헌병대가 하디타 학살현장을 검증하고, 생존자들을 면담하고, 해병대원을 심문하였다. 해병대가 주장한 사건전모가 허위로 판명되자 킬로중대원들은 서로들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하였다. 군 조사위원들은 미 국회위원들에게 사건을 설명하면서 몇명의 킬로중대원들이 살인 죄목으로 기소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직무유기와 위증의 죄목도 첨가 될것이라고 하였다. 현재까지, 킬로중대장과 제3 대대장을 포함하여 장교 3명이 해임되었다. 사건조사의 초점은 당일 킬로중대를 지휘했고 모든 학살 현장 가까이 있었던 한 하사관과 사살에 직접 참여한 몇 중대원들에 맞추어 지고 있다. 25세의 하사관 우터리취를 지목하고 있다. 9명 정동의 다른 해병대원은 학살을 목격하고도 가만히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해병대의 학살에 언급하면서 “관련자들은 법에 의하여 처벌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이 사실을 지난 3월에 알고도 자기에게 보고하지 않은 럼스펠드를 심히 문책하였다고 한다. 이라크의 말리키 수상은 연합군의 민간인에 대한 습관적으로 하는 공격을 심히 비난하고 많은 군인들은 이 단순한 의심이나 육감만으로 민간인들을 사살한다고 하였다. 미 사령관들은 군인들이 도덕과 윤리에 대한 2시간 짜리 교육을 받을 것을 명령하였다. 미군 당국은 이 조치는 맥빠지고 단지 체면 유지를 위한 것이라는 비난을 부인하고 있다. 고위사령관들이 하디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의구심이 일고 있다. 몇 이라크인들은 미해병대가 이 지역 집에 불을 놓아 없애 버렸다고 하나, 다른 사람들은 전투기가 폭탄을 투하하였다고 한다. 폭탄투하를 하려면 고위사령관들의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의구심을 뒷바침하고있다. 15명의 희생자 가족에게 사망자당 $2500 이 지급되었다. 이 보상을 명령한 고위장교는 사망자들이 미군의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기에 보상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학살 직후 킬로 중대원들은 전사한 테라자스의 장례식을 갖고 “테라자스, 너는 우리의 위대한 친구다” 라는 묘비를 세웠다. 24명의 희생자들은 순교자의 묘지라고 불리우는 곳에 매장되었다. 이 묘지의 벽에 쓰여진 낙서는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가 여기의 가족들을 죽였다” 몇 희생자 가족이 선임한 변호사인 모하메드는 생존자들은 킬로 중대원들이 기소되었다는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 이들은 중대원들에게 내려질 형량은 미국에서 개를 죽인 사람에게 내리는 형량과 비슷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미국사람에게는 이라크인들은 다만 개이기 때문이다” <이라크 전 미군 양민 학살 사건 의혹 일지> ▶현재 군당국 수사중인 사건 장소 : 하디타(Hadita) 날짜 : 2005년 11월 19일 사망자 : 24명 이라크 주민 미 해병들이 동료 해병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24명의 이라크 양민을 학살했다는 의혹으로 현재 군 당국 수사중 장소 : 하만디야 (Hamandiya) 날짜 : 2006년 4월 26일 사망자 : 1명 이라크 인이 집에서 체포된 후 사살당함. 8명의 해병과 해군 의료병 살해혐의 ▶국방부 판결 장소 : 이샤키(Ishaqi) 날짜 : 2006년 3월 15일 사망자 : 이라크측 15명, 미군측 4명 미군 병사들 알카에다 기지로 의혹되는 주택을 급습. 먼저 사격을 받은 후 응사했다고 밝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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