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갑오경장 16-1 |
보스톤코리아 2012-04-02, 14:36:33 |
1895년 초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일부세력이 국왕 고종을 폐위시키고,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1870-1917)을 왕으로 옹립하려다가 발각된 역모사건이 사건이 있었다. 일반이 알기는 대원군이 동학농민군과 내통하고, 또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의 좌보귀 장군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면서 중국에 의지하여 왕권을 찬탈하려던 음모사건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 역모사건은 갑오경장의 성패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것임으로 그 진상을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당시 일본의 일간지에 의하면, 이준용의 역모사건은 내무대신 박영효가 폭로하였다고 보도되었다. 그리고 이규완 경무사가 1895년 4월 17일 순검 60명을 인솔하고 대원군의 저택) 운현궁으로 가서 이준용을 체포하여 고등법원으로 이송했다고 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은 법무협판 김학우가 암살된 후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왕의 특명으로 주일 한국 공사에 임명되어 일본에 파송되었다. 그러면 국왕께서는 왜 이준용을 주일 한국공사에 임명하여 급히 일본에 보냈던 것인지,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홍집내각은 이준용을 일본에 유학 보냈다고 얼버무렸던 것이다. 이준용의 일본 파견은 국왕의 특명이라고 하였지만, 실은 일본의 권고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이준용은 법무협판 김학우의 암살 사건에 관련되어 1895년 4월 17일 소환되었다. (일본시사시보 당일자 참조) 그런데 일본의 ‘동경아사히 신문’은 이준용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일본주재 공사 이준용이 사직하여 심문을 받았다” 고 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이준용의 역모사건은 1895년 5월 13일 고등법원에서 그 선고공판이 열렸다. 그 역모사건에 연류 되어 처형된 자는 다음과 같다. 사형 박준양(朴準陽), 이태용(李泰容), 고종주(高宗柱) 전동석(田東錫), 최형식(崔亨植) 종신형 유형 이준용(李埈鎔)(특사로 10년형으로 감형), 한기석(韓祈錫), 김국선(金國善) 15년 유형: 3명 10년 유형: 2명 선고 공판에 관한 기록을 찾지 못해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그 사건의 배후 세력과 동기가 아무래도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청나라는 이미 일본에 패하여 더 이상 의지할 것이 못되고, 또 신하가 임금을 폐위하거나 시해하는 역모사건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당한 시간을 두고 치밀하게 계획된 사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반대 권력의 최 측근에서 조선의 내정 개혁을 해 온 것은 민비였다. 더욱이 청나라가 일본과의 전쟁에 패망한 후 러시아의 세력을 끌어 들여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는 민비가 곤란한 존재였던 것이다. 친 러 경향의 민비를 그대로 놓아두고 일본은 뜻대로 조선의 정치개혁을 성공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이참에 고종을 아주 폐위시키고, 대신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하면 왕위계승 문제도 도의에 어긋나지 않고, 또 민비의 제거 문제도 자연스럽게 된다고 본 것 같다. 우리는 이준용의 역모 사건을 전후한 다음의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이준용의 역모사건이 폭로된 후, 즉각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소환되어 1985년 5월 5일 본국으로 돌아갔다. 후임도 아직 결정이 안된 상태에서 이노우에 공사를 급히 소환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또 의심스러운 것은 이노우에 일본 공사가 물러간 후 김홍집 총리가 사직한 사실이다. 김홍집 총리는 이준용의 역모 사건에 대한 총리로서의 책임을 지고 사직한 것이 아닌지? 이러한 여러 사실로 볼 때 이준용의 역모사건은 간교한 일본이 권력에 눈이 어두운 대원군을 이용하여 고종을 폐위시키려고 꾸민 음모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김홍집 총리가 사임한 후 곧 주미공사를 지낸 박정양 학부대신이 총리에 임명되었다. 박정양 총리는 반람 박 씨로 일찍이 주미 한국 공사를 지낸 미국통이었다. 그는 내부대신 박영호의 종숙이며, 또 박영효보다 20여세나 연상인 노 재상이었다. 국왕전하께서 박정양을 총리대신에 임명한 것은 주한 러시아 공사 웨벨씨의 건의에 따른 것으로 일본통인 박영효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제 2차 김홍집 내각에서도 총리만 갈리고 다른 각료에는 변동이 없었다. 유신 개혁사업은 박정양 총리 하에서도 여전히 내부대신 박영효의 지도로 추진되었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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