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18세 풍월주風月主 춘추공春秋公(10) |
보스톤코리아 2020-12-07, 11:34:21 |
631년,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르기 전년, 즉 진평왕 재위 마지막 해(53년) 5월, 칠숙과 석품이 주동이 되어 난을 일으켰다. ‘칠숙의 난’ 의 동기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이 난이 단순히 진평왕에 대항한 반란인지, 아니면 덕만공주의 차기 여왕 즉위에 대한 반란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진평왕이 고령에다 병들어 있었고(곧 세상을 떴다), 덕만이 후계자로 지목되었기에 여자가 (최초의)왕으로 오르는 사태에 대한 반란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렇게 즉위한 선덕여왕은 치세15년 동안 ‘최초의 여왕’ 이라는 ‘역사적인 사건’ 외에 뚜렷한 치적이 별로 없다.319) 즉위 당시 선덕여왕의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부왕인 진평왕이 54년간 왕위에 있었고, 그외 인척들의 생몰년의 기록으로 보아 50대 중반으로 추측할 수 있다.320) 아마도 고령이었기에 재위 5년(636년) 에 병이 들었는데 좋은 약과 많은 기도를 올렸지만 효과가 없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선덕여왕이 사망 시기와 묻힐 장소를 예언/예측하면서 왕이 신이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지만, 좋지 않은 건강으로 인하여 곧 사망할 것을 예측한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선덕여왕의 재위 15년 동안은 전쟁만 하였다. 침공만 당하였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고구려로 부터는 기록상으로 3회(638년 칠중성 – 현 경기 파주, 639년 하슬라주 – 강원 강릉, 644년 연개소문이 직접 지휘한 침공) 에 지나지 않지만 백제로 부터는 쉼도 끊임도 없이 가히 파죽지세의 공격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선덕여왕 재위시에는 대야성을 비롯하여 44~52개 정도의 성을 잃어버렸고 회복한 성은 단 한개도 없다(삼국사기의 기록). 그리고 645년11월에 이찬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는 곧 염종과 함께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 라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647년1월, 이 명분은 병중에 있었던 선덕여왕에 대항한건지, 아니면 곧 즉위할 진덕여왕에 대항한건지,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이 난은 김유신이 이끄는 근왕군과 공방을 하다가 김유신이 연鳶을 띄우는 기지를 발휘하여 진압하였다. 근왕군에는 김춘추, 김염장 등 화랑도의 풍월주를 비롯하여 많은 낭도들이 참전하였다. 선덕여왕은 난이 채 진압되기도 전 그해 1월8일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국반갈문왕(진평왕의 아우) 의 딸 승만이 진덕여왕으로 즉위하였다. 알천을 상대등으로 삼았고 김춘추를 비롯한 사신들을 당나라에 지속적으로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김춘추의 다양한 외교활동은 결국 당태종을 움직여 군사적 지원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구체적인 활동을 살펴보기 전에22년 전인 625년으로 돌아가 보자. 김춘추는 문희의 미모에 빠져 사랑을 나누고 임신을 시켰지만 그녀를 부인으로 받아드리는걸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당시 정궁부인인 보라궁주가 있었고 보라처럼 아름다운 딸 고타소의 재롱에 흠뻑 빠져 있었으니, 문희를 둘째 부인으로 들이겠다는 말을 감히 부인 보라에게 꺼내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자 불러오는 동생 문희의 배를 보고 있던 김유신은 또 한번의 계략을 꾸미며 왕성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625년 어느날 선덕공주가 김춘추를 비롯한 여러 신하들을 데리고 남산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북쪽을 바라보니 교동 김유신의 집에서 심상치 않은 불길과 연기가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그래서 공주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시종하던 신하들이 대답하길, 김유신이 마당에 장작을 쌓아놓고 혼외정사하여 임신한 동생을 태워 죽이려고 한다고 고하였다. 동시에 곁에 있던 김춘추는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하였다. 선덕공주는 금방 알아차리고 김춘추에게 네가 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으냐고 하니, 김춘추는 단숨에 남산을 내려와 남천을 건너 김유신의 집으로 달려가 장작더미 위에서 타 죽을뻔 한 문희를 구하였다(당시 김유신의 본가였던 재매정택의 집터는 현존하고 있다, 재매정 - 사적 246호). 그 후 춘추와 문희는 포사(포석정)에서 결혼하였고, 문무왕이 될 아들 법민을 낳았다(626년). 한편 정궁부인 보라는 둘째를 출산하다가 산고로 사망하였다. 319) 즉위 직후 대사면을 하였다. 또한 모든 주와 군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해 주는 선정을 베풀었다(이것은 선덕여왕의 치적이라기 보다는 진평왕이 쌓아 놓은 국부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선덕여왕의 재위기간 동안 겪은 내우외환의 위기 가운데서도 숭불정책은 지속적으로 시행되어 전국에 수많은 사찰들을 건립하였다. 현존하는 사찰들이 무려 25개나 되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기타 자료들에 의하며 45여개의 엄청난 사찰을 건립하였다. 당시 건립된 몇몇 중요한 사찰을 보면 분황사 건립(재위 3년, 634년), 영묘사 건립(재위 4년, 635년),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재위 14년, 645년) 등이다. 320) 즉위 당시 국인들이 선덕여왕을 칭송하며 올린 미칭美稱이 성조황고聖祖皇姑인데 여기에 ‘할머니’ 를 뜻하는 姑자가 포함된 것을 보면 아마도 고령이었다고 추측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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