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7. 대평원 전쟁의 서막 (4) |
보스톤코리아 2015-11-02, 11:29:27 |
40년 대평원전쟁의 서막 (계속) 보다 못한 그래턴 소위는 술병을 뺏어 깨버렸다. 술로 제정신이 아닌 통역이 제대로 상태편의 이야기를 전해줄 리가 없었다. 잘못된 통역은 서로 상대방을 불신하게 만들어 증오심만 더 키웠다. 통역인은 인디언 전사들을 여자로 부르며 인디언들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심지어는 "여기 미군들이 온 이유는 인디언들과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디언들을 모두 죽이기 위해서 왔다"는 식으로 얼토당토 안하는 말을 지어서 통역을 하기도 했다.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해지자 그래턴이 인디언들과의 대치를 끝내고 자신이 데리고 온 파견부대로 돌아가려는 순간에 미군 병사 한 명이 추장에게 총을 쏘았다. 이에 격분한 인디언들이 한꺼번에 미군들에게 달려들어 그래턴 소위와 통역자와 28명의 병사를 그 자리에서 모두 죽였다. 이 전투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생생히 지켜보고 있는 14살의 한 오글라라 지파 인디언 소년이 있었다. 그는 크레이지호스였다. 백인과의 충돌로 인디언 추장이 사망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 이 소년은 그 때부터 전사가 되어 인디언들의 생명과 땅을 지키기 위하여 백인들에 맞서 끝까지 싸울 것을 굳게 결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의 신문들은 이 사건을 그래턴 학살로 표현했다. 사건의 세세한 경위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 사건을 보도한다면 그런 표현을 쓸 수 있었겠지만 내용을 파악해 보면 학살보다는 전투로 취급하는 게 옳을 듯싶다. 라라미 조약에 따르면, 인디언이 소를 훔쳐간 케이스와 같은 일들은 라라미 요새의 군인이 개입할 성격이 전혀 아니고 연방정부에서 임명한 인디언 담당관(indian agent)이 처리하도록 돼 있었다. 플레밍 중위나 그래턴 소위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 같이 보인다. 이와 같이 서부개척시대의 미국은 우리가 흔히 서부활극 영화에서 본 것처럼 질서가 있거나 정돈된 사회가 아니었던 것 같다. 방금 봤듯이 엉터리 통역으로 엄청난 불상사를 불러온다든지, 전쟁 중에 과음하여 취중전투를 하기도 하고, 전사하거나 학살당한 시체를 대상으로 온갖 몹쓸 짓을 해대기도 하고, 일부 광신적인 지도자들 중에는 신의 이름으로 인디언 박멸을 외치기도 한 기록을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된다. 또한 병사들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갓 이민 와서 달리 직업을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로서 이들은 제대로 된 군사교육도 받지 못하고 서부의 인디언전쟁 현장으로 투입되었다고 한다. 미국정부의 전쟁부(Department of War)는 이 사건을 인디언들이 계획적으로 꾸민 사건으로 규정하여 이에 대한 응징을 추진하였다. 1855년 4월 파리에 머물고 있던 하니(William S. Harney)대령을 불러들여 네브라스카에 있는 커니 요새로 보내 인디언들을 징벌할 부대를 구성토록 하였다. 그해 8월 24일 하니는 600명의 병역을 이끌고 커니 요새를 떠나 서쪽으로 인디언 마을을 찾아 나섰다. 떠나면서 그는 "신의 뜻에 따라 전장으로 향한다. 더 이상의 평화는 없다"라고 이야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9월 3일 하니 부대는 약 250명의 브룰레 족이 살고 있던 네브래스카의 Blue Water Creek 캠프를 기습하여 86명을 살해했다. 이 전투를 'The Battle of Ash Hollow', 또는 'The Battle of Blue Water Creek'라고 부른다. 사망자 중에는 여자와 어린아이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수우 인디언들은 그 후 하니의 별명을 '백정(butcher)'이라고 지어줬다. 명백히 미군의 발포 때문에 시작된 전투에서 미군 측 인원 30명이 사망한 데에 대한 앙갚음으로 아무 관련도 없는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을 포함하여 그 세 배에 가까운 인디언들을 죽인 일은 정당한 명분에 따른 보복 전쟁이라기보다는 학살 측면이 더 강한 것 같다. 오늘날 하니라는 이름은 라코타의 성산 블랙힐즈의 최고봉(Harney Peak)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산티 수우족에 대한 사상최대 사형집행(1862년) 이민자들이 19세기 중반부터는 미시시피 강을 건너 서부로 인디언의 땅을 침범하여 농지와 목장을 일구며 정착촌건설을 확대해 나갔다. 인디언의 활동무대는 백인들에 의하여 포위되고 백인들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사슴이나 들소 같은 사냥감은 크게 줄어들어 전통적인 생활방식의 유지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1851년 연방정부는 미네소타 삼림지역에 살던 산티 수우(Santee Sioux) 족과 두 개의 조약(Treaty of Traverse on July 23, 1851 and Treaty of Mendota on August 5, 1851)을 맺고 거의 남한 면적에 육박하는 비옥한 땅을 가로챘다. 조약에 따라 산티 수우족이 미네소타 강 유역의 작은 보호구역으로 쫓겨 가는 대가로 미국 정부로부터 연금과 생활용품을 정기적으로 지급받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남북전쟁으로 재정이 어려워진 연방정부는 연금과 생필품을 제때 지급하지 못하는 사태가 생겼다. 그러지 않아도 백인 이민자들이 인디언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동안 불만이 쌓여 오고 있었는데 연금지급 지연으로 갈등 수준이 급격히 높아져 급기야는 양측 간의 전면적인 전쟁에까지 이르렀다. 연금과 기타의 보급품 지급과 관련하여서는 지급시기의 지연 말고도 부패한 연방정부 주재관과 사기를 일삼는 상인들로 인하여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1862년 8월 15일 인디언들이 외상으로라도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연방정부에서 파견된 주재관과 인디언과의 거래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인들을 만났을 때 상인중 한 명인 Andrew Jackson Myrick은 "배가 고프면 풀이나 뜯어먹고 자기 똥이나 먹으라고 해"라고 심하게 모욕하였다. 실제로 뒤에 일어난 전쟁 중에 인디언의 손에 살해된 그의 입에는 풀이 가득 채워졌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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