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83 |
보스톤코리아 2015-06-01, 12:10:19 |
1971년 1월 17일 김운용의 태권도계 등장으로 우리나라 무도계는 태권도뿐만 아니라 타 무도에 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치면서 일대 요동搖動을 쳤다. 국제기구인 ‘국제태권도연맹(ITF)’은 ‘대한태권도협회’로 부터 전혀 협조를 받지 못하고 사사건건 반대의 벽에 부딪치면서 좌초의 위기에 몰렸다.(김운용은 그 후 장기간 대한태권도협회를 이끌었다. 7 – 14대, 19 – 20대 회장) 1971년 박정희대통령이 태권도를 국기로 지정하면서 ‘국기 태권도’의 휘호를 내렸다(1971년 3월 20일). 물론 국제기구의 수장인 최홍희가 아닌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인 김운용에게로… 그리고 김운용은 태권도계(당수도, 공수도, 태수도, 화랑도 등…)를 ‘천하통일’ 하였다. 상대적으로 기타의 권법이나 무도의 입지도 좁아들게 되었고, 무엇보다 최홍희가 설자리는 사라지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박정희에 의해 정치적인 생명을 잃고, 태권도 지도자들과의 불화로 인하여 태권도에서도 입지를 상실한 최홍희는 1972년 1월 캐나다(Toronto, Canada)로 이민을 하였고, ITF 본부도 그와 함께 토론토로 옮겼다. 최홍희는 그때까지 태권도의 세계화를 위하여 많은 업적을 쌓았지만 자신의 설자리를 잃었고, 또한 김운용이 자신이 창립한 ITF의 총재가 될 것이 자명하기에 이민과 함께 ITF를 토론토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그 해 3월 망명하였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1972년 11월 30일 태권도를 관장하고 보급하는 ‘태권도 중앙도장(국기원)’ 이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특수법인체로 준공되었다. 그리고 1973년 5월 25일 17개국이 참가하는 제1회 세계태권도 선수권 대회가 국기원에서 개최되었다.(이 대회가 바로 태권도를 올림픽 종목으로 스포츠화한 역사적인 시금석이다) 그리고 1973년 5월 28일 김운용에 의해 ‘세계태권도연맹(World Taekwondo Federation, WTF)’이 창립되었다. 캐나다로 망명한 최홍희는 태권도를 전세계로 보급하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자신이 창립한 국제태권도연맹을 통하여 1974년에는 몬트리얼(Montreal, Canada)에서 제1회 세계대회를 열면서 세력확장에 고군분투하였다. 태권도는 우리나라의 무도이므로 보급의 전위부대가 되어줄 사범들은 한국사람이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미국과 캐나다에 이민한 교포들을 대상으로 사범양성에 최선을 다하였지만 한정된 인적 자원은 그의 계획을 난관에 부딪치게 하였다.119) 그런 와중에서 최홍희는 북한으로부터의 접촉을 받았다. 즉, 해외에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태권도를 보급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있던 중 북한으로부터 받은 초청장은 그를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고, 그와 더불어 그의 유신체제 비판과 반한운동은 강도가 심해졌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쏜 총탄에 박정희가 유명을 달리하면서 1961년 ‘5.16군사정변’ 때 부터 시작하여 깊어가기만 했던 그 두사람의 갈등은 화해의 기회도 없이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최홍희가 북한을 방문할 당시 북한에는 물론 태권도가 없었다. 그가 1980년 태권도 보급을 시작할 때까지 북한에는 송도관, 공수도, 레슬링, 권투 등을 혼합해서 만든 ‘격술’만이 있었다. 그는 외아들 최중화를 비롯하여 15명의 사범단을 인솔하여 1980년 북한을 방문하였다. 김일성 주석을 만나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함은 물론 다른 공산국가의 보급 지원약속도 받아낸다. 그리고 국제태권도연맹(ITF)은 이때 부터 ‘친북단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세계태권도연맹(WTF)’과는 무도뿐만 아니라 대립적인 이념의 장場에서 조금도 물러설 수 없는 기나긴 대결이 막을 올렸다. 하지만 이 대결의 내막을 아는 국민들은 많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최홍희가 캐나다로 이주/망명한 1972년 부터 1997년까지 약 25년간 일반 국민들에게는 ‘국제태권도연맹(ITF)’의 존재조차도 알려지지 않았고, 알고 있는 정보기관이나 무도계에서는 일반인들에게 언급자체가 금기사항이었다.120) 반면 최홍희의 ITF세력은 무서운 기세로 번창하였다. 119) 당시에는 미국과 캐나다에 한국인 태권도 사범수가 현재처럼 많지 않았기에 자신(ITF)을 따르는 사범들을 많이 확보할 수도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망명을 한 후 박정희의 유신체제을 비판하고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태권도 보급과 함께 반한운동을 했기에 조국을 사랑하는 보수성향의 무도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1980년 최홍희가 북한을 방문하면서 전향한 후로는 과거 군軍에서 연결된 인맥으로 ‘충성’을 하는 몇몇 사범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그를 떠났다. 120) 1997년 시사주간지 발행인 고 손충무가 ‘인사이드 월드’에 내용을 기사화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 일반 국민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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