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79 |
보스톤코리아 2015-05-04, 11:52:23 |
서양인들에게는 ‘제너럴 초이(General Choi, 최 장군)’ 와 ‘태권도의 창시자(아버지)’로 더 잘 알려진 최홍희崔泓熙, 그는 굴곡 심한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같이 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누구나 공과가 있고 극과 극을 오가는 평가가 따를 수 있지만 모름지기 그의 삶은 특이하다. 일본 조기유학, 군인의 길, 태권도의 확산을 통하여 군내軍內서의 자신의 정치세력 구축화, 태권도의 작명, 외교관, 태권도 협회 창립과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기구인 국제태권도연맹 창설, 망명과 친북활동 그리고 평양에서의 쓸쓸한 죽음113) 등이 그가 살다가 간 족적이다. 그는 태권도를 통하여 동양문화의 서양화에 일조 하였고 ‘태권도’란 작명자로 당수/공수(가라데의 우리식 발음)의 옷을 갈아입혀 우리의 무술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지만 캐나다로 망명(정치적인 탄압이었던지, 지극히 개인적인 사상과 이념에 바탕한 감상주의적이었던지를 떠나서…) 후 보여준 그의 행적은 자신을 스스로 역사속에서, 특히 태권도계의 역사속에서 지워가고 있었다. 그의 인생 후반에서 보여준 이념이나 사상을 떠나서 그가 신명을 바쳐 전파한 태권도는 많은 서양인들의 정신에 살아 숨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가 이룩한 태권도의 업적을 제대로 인정 받거나 정당하게 평가 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가 살아온 삶의 족적을 무도(태권도) 중심으로 따라가 본다. 그는 1918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으로 조기유학을 갔다. 하지만,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다니던 국민학교에서 퇴학당하고 13살 때 귀국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부터 한일동114) 으로 부터 태껸과 서도를 사사받았다. 소위 문무를 겸한 한일동으로 부터 고액의 수업료를 내면서 개인지도를 받았다. 6년간의 한학과 태껸을 사사한 최홍희는 1937년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동아상업학교(야간부)를 거쳐 1943년 중앙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유학을 가는 즉시 가라데 수련(한국인 임씨 밑에서 수련)을 계속하여 해방 당시 그는 2단을 소지했다. 대학 학업과 무술 수련을 겸한 그는 유학 가기 전에 익힌 태껸의 실력을 바탕으로 동경 YMCA에서 강의를 하였다. 이는 그가 분명 총명하였고 뛰어난 실력를 소유했음을 입증하는 사실이다. 1944년 1월 일본군에 징집되어 평양 제30보병사단 42부대에 배속되었다. 그해 11월 조선학병들을 중심으로 반일동맹을 전국적으로 조직하였다. 하지만 부대를 탈출하기 직전 일망타진되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그는 6년의 실형을 선고 받고 평양의 형무소에서 복역 중 해방을 맞아 석방 되었다.(사형을 선고 받고 집행 이틀 전 일본의 패망으로 옥문을 나섰다는 드라마틱한 설도 전한다) 당시의 혼란한 사회적 환경은 집안이 부유한 유학파들이 가라데를 배우고 와서 자신을 지켜줄 것은 ‘무술이라는 힘’ 밖에 없다는 사회적 여론에 힘입어 당수/공수(가라데) 도장들이 문을 열게 되면서 소위 현대적인 경영방식의 무술도장이 정식으로 탄생하면서 이른바 초기 5대 문파115) 가 창설되었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입교 및 수료, 조선경비대 육군 참위로 임관하여 국군창설요원의 한사람으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대령시절 미육군 군사학교 초,고등군사반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전 발발로 귀국하여 전쟁 중 창설된 육군종합학교의 부장교수를 역임하며 현대전술에 입각한 무술(태권도)의 기술과 동작을 연구할 수 있었다.(아마도 이 때가 그가 태권도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아니었나 싶다) 그 후 1953년 9월, 육군 소장 시절, 제주도 모슬포에서 육군 제29사단이 창설되었고 그가 초대 사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부대에서 전군에 무술(태권도, 당시에는 태권도란 고유명사가 없었다)를 보급하는 기간요원들이 양성되었다.(이 육군 제 29사단은 1954년6월 제주도를 떠나 1군단에 배속되었으며, 사단 창설 1주년과 군단 창설 4주년 기념식 때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그 위용장엄한 태권도시범이 펼쳐졌다) 113) 2002년 6월 15일 평양에서 사망 후 혁명열사능에 안장되었다. 북한의 다부작 영화 “민족과 운명”의 제6부 ~ 제9부는 최홍희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114) 한일동韓溢東(1880 – 1951)의 호는 옥람玉藍이다. 강원도 동해 출신으로 당대의 명문가이고 서예의 명필이자 문장가였다. 독립운동가이며, 또한 태껸의 고수였다. 115) 초기 5대 문파는 청도관(이원국), 무덕관(황기), 조선연무관(지도관, 전상섭), YMCA 권법부(창무관, 윤병인) 그리고 송무관(노병직)이다. 무덕관의 황기만 제외하고 모두 일본 유학파이다.(황기는 만주에서 무도수련을 시작하였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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