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씨의 뿌리> |
보스톤코리아 2014-06-23, 11:53:47 |
서기 2000년 10월 현재 남한 전체 인구는 약 4500만명으로 집계되었다. 성씨가 728개, 본관이 4,199개나 되는데, 근래 늘어나는 국제 결혼으로 성씨나 본관이 급증하고 있다. 성씨 별로는 김 씨가 992만명,(21.6%)으로 제일 많고 본관별로는 김해 김 씨가 412만명으로 수위가 된다. 경주 김 씨는 173만명으로 밀양 박 씨나 전주 이 씨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본관이 되지만, 경주 김 씨로부터 분파된 365개 본관을 합치면 모두 630만명이 된다. 경주 김 씨에서 분리되었지만 김 씨 성을 쓰지 않는 안동 권 씨, 수성 최 씨, 감천 문 씨, 강릉 왕 씨, 곡산 연 씨, 광주 이 씨, 영양 남 씨, 철원 궁 씨, 태안 사 씨를 합치면 경주 김 씨로부터 시작된 인구는 700여만에 달한다. 우리는 경주 김 씨로부터 시작한 이들 모두를 합쳐 신라 김 씨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AD65년 금성 시림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궤짝 안에서 태어난 김 알지의 후손들이다. 김해 김 씨는 서기 42년 하늘로부터 김해 구지봉으로 내려온 6개의 알 중에서 제일 먼저 태어난 김수로 왕이 시조가 된다.
김수로 왕과 허황옥 왕후는 10남 2녀를 출산했는데 둘째, 셋째 아들은 허왕후의 요청으로 허씨 성을 사성해서 셋째 김해 허 씨의 시조가 되었다. 후일에 하양, 양천, 태인, 시산, 이언 허 씨로 분파되었다. 통일신라 경문왕 때 허기가 당나라에 맞서 안록산의 난으로 궁지에 처한 당현종을 배종한 공으로 당날 황제 이(李)씨 성을 사성받아 안주 이 씨(후일에 인천 이 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해 김 씨 김유신의 둘째 아들 김원술이 전주 김 씨의 시조가 되었으니 이들 역시 김해 김 씨의 분파가 되고 김수로 왕의 형제 이진아 씨가 고령 대가야의 시조가 되어 함창 김 씨를 열었으니 이 또한 김해 김 씨의 분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김 씨와 허 씨들은 모두 합쳐 가락 김씨라고 부르는데 모두 합치면 450만명에 육박한다. 그렇다면 한반도 최초의 김 씨, 김해 김 씨의 시조 김수로 왕은 누구인가? 김수로 왕이 태어나고 23년 후에 태어난 김알지는 또 어디서 왔는가? 이 숙제에 대한 답변을 3국을 통일한 신라 30대 문무왕이 제시하고 있다. 향후 독자들은 "김 씨의 뿌리"라는 제목으로 문무왕을 만나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제목은 "신라 금관"이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 잘아할 수 있는 문화 유산이 많겠지만 손을 꼽는다면 각자가 순서는 엇바뀔지라도 1)한글, 2)금속활자, 3)석굴암, 4)신라금관, 5)미륵 보살 반가 사유상, 6)대장경, 7)고려청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얼마 전에도 뉴욕에서 신라금관과 반가사유상 전시가 있었다. 대단한 호평이 줄을 이은 것은 물론이다. 덕분에 우리들의 자긍심도 만족하게 충족되었으니 고마운 일이다. 신라 금관에는 신라 사람들의 신앙과 인생의 여정이 함축되어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신라인들의 사상은 신라 사람들만의 관념이 아니고 실크로드를 가로지르는 유목민들과 바이칼 호반의 시베리아 사람들도 똑같은 사상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북방유목민족과 신라 가야를 연결했던 연결 고리가 있었을 것이다. 전 세계에서 발견된 금관은 지금까지 딱 10개 뿐이다. 그 중 8개가 한반도에서 발견되었고 6개가 경주에서 발견되었다. 앞으로도 더 많이 발견될 가능성이 아주 많다고 한다. 금관에 관한 한 한국은 종주국이다. 1921년 금관 총에서 최초의 금관이 발견되었으며 더불어 많은 금장신구가 출토되었다. 금으로 만든 유물만 모두 7.5kg이 쏟아져 나왔고, 모두 4만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황남 대총에서는 금관을 비롯해서 모두 7만 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금관을 비롯해 금,은,동으로 만든 장신구와 석기, 갑옷, 무기, 마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물이 출토된 것이다. 로마에서 온 유리 제품도 30여점이 나왔고, 페르시아의 장식보검도 있었다. 실크 로드 고창국에서 선물로 보내준 은사발이 있었고 자바에서 온 목걸이도 있었다. 그 많은 유물 중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몇 개나 볼 수 있었을까? 이번 기회에 사진으로나마 가능한한 많은 유물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잊혀진 가야사"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가야는 500년 이상(AD 42 - AD 562)이나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존속한 국가였지만 그 실체를 인정받지 못하고 삼국시대의 변두리를 맴돌고 있었다.
그 결과가 가야사 연구가 전무했던 시절에 일본학자들이 가야가 장기간에 걸쳐 왜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임나본부설을 주장해 가야사 연구에 걸림돌이 되어왔었다. 하지만 1970년 이후 가야왕족들의무덤인 대성동 무덤군을 발굴하고, 김해 양동리, 동래 복천동, 합천 옥전, 고령 지산동 무덤을 발굴하면서 당시의 선전 문물인 철기와 와질토기를 대량으로 발견하게 되었다. 가야의 처릭가 일본에 이어지고 가야의 와질토기는 일본의 스에기 토기로 이어진다. 가야의 선진문화가 오히려 일본국가 발전의 모체가 되었고 일본 개국의 주체가 가야도래인이 주도하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임나본부설을 잠재울 수 있었다. 현대 역사는 주위 여러나라와의 교류사인만큼 세계사적 관점에서 자국역사를 풀이해야 하는데 일본은 국수주의에 편집하다가 엄청난 역사 왜곡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가야가 서기 400년에 종발성에서 고구려 광개토 대왕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기 전까지는 가야 문화가 오히려 신라문화를 앞지르거나 대등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가야의 문화 유물을 펼쳐보여 신화로 시작한 가야사가 엄연한 과거의 실체였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이고 싶어 이 글을 쓰려는 것이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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