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39 |
보스톤코리아 2014-06-23, 11:44:46 |
숙종 때 군교 김체건이 일본으로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다녀오면서 검보劍譜를 얻어 와서 왜검을 전했다. 그는 무예와 검법에 민첩하고 절묘하기를 버금하는 자가 없었다. 왜검보에는 네가지가 있는데 토유류, 운광류, 천유류, 유피류가 그것이다. 김체건이 전한 이 검법은 모두 없어지고 운광류만이 남아서 정조대까지 전했다. 그리고 기법을 전승하는 가운데서 새로운 기技와 뜻이 나와서 ‘교전지세交戰之勢’라 하였으며 이를 ‘교전보交戰譜’라고 칭하고 구보舊譜와 나누어 하나의 검보로 하였다. 그리고 김체건의 교전보의 그림은 양날인 검이었으나 나중에 무예도보통지의 왜검편의 그림은 한날인 도이다. 이것은 두 사람이 교전세를 연습중에 서로 찔리고 베이는 것을 염려해서 한날인 도로 바뀐것이다.(무예도보통지) 다섯째로는 ‘교전交戰’이다. 교전은 왜검을 전한 김체건이 왜검의 기법을 이용하여 만든 기예이다. 다른 명칭은 왜검교전이다. 두사람이 마주보고 서서 약속교전을 하는 형태이다. 여섯째는 ‘제독검提督劍’이다. 제독검 역시 예도와 비슷한 요도(단도)이다. 제독검보 14세勢는 이여송검법이다. 이여송은 명나라의 장군이지만 그의 5대조 이영李英이 조선사람이었는데 명나라로 귀화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의 제2차 원정군를 이끌고 한반도에 왔다. 그는 원군의 우위를 이용해 거들먹거리며 싸우지도 않고 있다가 이에 분개한 유성룡, 이항복, 이덕형의 항의와 재촉을 받고서야 출전하였다. 1593년 1월 유성룡의 부대와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였고 그 길로 한양으로 향하던 도중 벽제에서 왜군에 패하여 다시 평양성으로 후퇴하고 나서 화의교섭 위주의 소극전을 펼쳤고 조선 측에서 재공격하라고 재촉하였으나 듣지 않고 그해 말 철군하였다. 그리고 요동성의 총병관으로 있다가 정유재란이 종결된 후 명으로 돌아 갔다. 1598년 토만土蠻(티벳트)과의 전투중에 전사하였다. 현재 거제도에는 이여송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무예도보통지에 보면 이여송의 5세손인 이원李源이 말하기를 “제독이 이 땅에 있을 때 통진금씨通津琴氏의 딸을 시녀로 취하여 몸에 지니고 있던 칼을 주면서 떠날 때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천근天根이라 하라.” 하였다. 그리고 과연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천근이라 하였고 거제도에서 살았으며 후손들도 많다. 그리고 영조 임금 때(1746년) 통제사 이언상李彦祥이 이천근의 현손자 이무춘李茂春으로 부터 그 칼을 얻고, 그 사유를 칼콧등에 새기고 칼자루 및 칼집을 장식하여 그 칼을 제독의 가문에 돌려 주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이 제독검의 길이는 3자 4치(102cm 정도)이고, 제독검술은 전진하여 전과 좌우를 상대하고 뒤로 후퇴하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어 적진을 뚫고 나아가는데 효과적이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보면 제독검을 배운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계사년 여름에 한성 묵사동에 병으로 누었더니 천장天將 낙상지駱尙志가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조선은 아직 마약한데 적은 아직도 국경 안에 있으니 명나라 원군이 돌아가기 전에 병법을 연마하여 가히 나라를 지키십시요> 하였다. 나는 즉시 장계를 올려 금군 한사립으로 하여금 70여인을 초모하여 낙상지에게 가서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낙상지는 자신의 장하에서 장육삼 등 10인을 뽑아 교사로 삼고, 창, 검, 낭선 등 기예를 연습하였은즉 낙상지는 이제독의 휘하이므로 제독검이란 명칭은 여기에서 나왔다.” 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계사년은 1593년이고, 천장天將은 명나라 장수를 높혀 부르는 말이며, 이제독은 이여송을 말함이다. 일곱째로는 ‘본국검本國劍’이다. 본국검은 속칭 신검新劍이라고도 하며 조선에서 탄생된 독창적인 기예이다. 조선의 왕궁을 지키던 금군들의 근무일지인 ‘금위영등록(1696년)’ 등에도 본국검을 수련하였다고 나와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 전기에도 수련한 기예로 추측한다. 본국검은 전후좌우를 모두 대적하는 기예이며 회전하는 동작과 찌르는 동작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무예도보통지에 보면 “여지승람與地勝覽에 이르기를, <황창黃倡은 신라인이다. 7세에 백제에 들어가 거리에서 칼춤을 추는데 구경꾼이 담장을 이루었다. 백제왕이 그 소문을 듣고 불러 당에 올라 칼춤을 추도록 명하였다. 황창랑은 이로 인하여 왕을 찔렀다. 그리하여 백제인들이 그를 죽였고, 신라인들은 그를 애달프게 여겨 그의 얼굴을 상으로 가면을 만들어 칼춤을 추는 모양을 지금까지 전하게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여지승람은 ‘동국여지승람’을 말하고 이 책은 성종때 편찬한 지리서이다. 나중에 중종때 나온 중보판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황창은 신라의 화랑인데 화랑 관창의 사실史實이 전설화된 것으로 본다. 관창은 계백장군에게 피살된 신라의 품일장군의 아들이며, 304년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피살된 백제 분서왕과 관창의 용맹성을 합친 전설로 보인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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