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권리 |
보스톤코리아 2014-06-16, 11:53:30 |
1971년 6월 13일, 펜타곤 페이퍼 1971년 6월 13일, 일요판 뉴욕타임즈에 처음 등장한 <펜타곤 페이퍼 Pentagon Papers> 특별 연재는 첫 회가 실리자마자 곧바로 사건이 되었다.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 결정과 관련된 국방부의 일급기밀”이 만천하에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제목이 낚시가 아니었다! 뉴욕타임즈 지면으로 공개된 국방부 기밀문서에는 미국 정부가 국민들에게 베트남전쟁에 관해서 수 년간 거짓말을 해왔다는 사실이 담겨있었다. 미국의 국제 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 심각한 균열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펜타곤 페이퍼는 1967년 미국의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 Robert McNamar의 책임 하에 작성된 국방부 1급 기밀문서로 공식 명칭은 <미국-베트남 관계: 1945-1967>이다. 1945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이 베트남전에, 그리고 더 나아가 인도차이나 반도에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 지를 기록한 방대한 분량의 각종 자료를 담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전쟁을 시작한 것은 1964년 통킨만 사건 이후였지만, 펜파곤 페이퍼의 제목이 암시하다시피, 미국은 이에 앞서 약 20년 간에 걸쳐 비밀리에, 치밀하게 베트남전을 준비했던 것이다. 펜타곤 페이퍼에서 충격적이었던 내용은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강화하게 (혹은 확전) 되는 계기가 되는 통킨만 사건의 조작이다. 통킨만 사건은 1964년 북베트남이 미 해군의 전함 USS 매덕스호와 USS 터너 조이에 어뢰정을 이용해 선제공격한 사건이다. 며칠 뒤 미국은 북베트남에 의회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보복” 목적의 폭격을 감행했다. 이후 의회가 통킨만 결의안 (The Gulf of Tonkin Resolution)을 통과 시켜,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군사적 행동에 대한 권한을 승인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실제 어뢰정 공격은 없었고 실제로는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이 미군의 베트남전 개입에 대한 지지여론을 확보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1968년 이후의 반전여론 베트남전의 개전 직후 미국의 여론은 전쟁 찬성 쪽이 우세했었다. 그러나 1968년을 기점으로 미국과 전 세계적으로 반전 여론이 확산되고 있었다. 먼저 1968년 초. 베트남의 설날인 텟 (Tet) 기간 북베트남 (베트콩) 측의 무장게릴라 (NLF, 혹은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들이 일시적으로 사이공주재 미국대사관을 급습한 사건, 이른바 텟 공세(Tet Offensive)는 미국민들에게 베트남전의 “효율성” 혹은 전쟁의 승리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또 한편, 전쟁의 명분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베트남전이 장기화하면서, “왜 베트남의 내전에 미국이 개입하는가?”에 대한 회의가 일반화되었다. 또한 1968년 3월 미군이 대다수가 여성과 노인, 어린이였던 민간인 500여명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한 <미라이 대학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베트남전은 더욱 ‘비도덕적인 전쟁’으로 보여질 수 밖에 없었다. 텟 공세로 인해 극도로 예민해진 미군은 NLF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면 여성과, 아이, 심지어 가축까지도 적으로 간주했다고 보고되었다. 1968년 대선의 쟁점은 단연 베트남전이 된다. 베트남전에 대한 당 내부의 이견으로 내홍을 겪었던 민주당을 가볍게 누르고 공화당 후보로서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은, 남베트남군 스스로의 군사력을 키워 베트남의 문제는 베트남이 해결하도록 도우면서 서서히 미군이 철군함으로써 종전을 준비하는 이른바 베트남화 (Vietnaization)를 내세웠다. 그러나 닉슨이 당선될 무렵, 베트남에 파병된 미군의 수는 약 58만명으로 최고에 달했다. 게다가 1969년에서 1970년에 걸쳐 미국은 베트남 인접 국가인 캄보디아를 공습한다. 북베트남으로의 보급로를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종전 계획을 발표하고 확전을 감행하는 정부에 대한 반전 여론은 당연히 거세졌다. ‘징집 대상’이기도 했던 대학생들의 반전 시위도 확대되었다. 1970년에는 켄트 대학교의 반전시위 도중 네 명의 학생이 시위를 해산하던 주방위군의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켄트 대학교가 전통적으로 ‘흑인학교’였던 탓에, 켄트 대학교 사건은 인종제로 비화되기까지 했다. “하버드였다면, 동일한 일이 발생했겠는가?”) 다니엘 엘스버그 국방부 산하 브레인 탱크인 랜드 연구소의 상임 연구원이었던 대니얼 앨스버그 (Daniel Ellsberg)가 비밀리에 유출, 뉴욕타임즈에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의 존재는 미국내 베트남전의 반전 여론을 더욱 강화시켰다. 당시 닉슨 행정부는 “국익에 반한다”는 이유로 펜타곤 페이퍼를 개제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같은 해 6월 30일 연방 대법원 판결에서 6:3으로 패했다(New York Times Co. v. United States, 1971). 사법부의 판단은 펜타곤 페이퍼를 개제하는 것이 수정헌법 1조에서 명시한 “언론, 출판의 자유” 영역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엘스버그의 용기 덕에, 미국민들이 자신들이 내는 세금이 어떤 뻘짓 (혹은 나쁜 짓)을 하고 있는 지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펜타곤 페이퍼가 처음 신문 지면에 출현한 지 43년 되는 오늘, 언론 출판의 자유는 왜 필요할 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봤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분단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위안부 문제에 일본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역사 의식 없는 광신도가 대한 민국의 총리 후보로 나섰을 때, 이를 보도할 수 있는 언론이 하나도 없다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그래서 필요한 거다. 언론 출판의 자유………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칼럼과 관련하여 궁금하신 점은 WisePrep 소피아선생님 (617-600-4777, [email protected])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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