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범주
보스톤코리아  2011-07-11, 15:45:40 
1787년 5월에서 9월까지, 필라델피아의 제헌회의에 참석했던 “건국의 아버지들”은 신생 공화국의 정부의 형태, 의회의 구성문제 등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울 때는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이들이지만, 인구 수라든가 노예제에 대한 입장, 주요 산업 같은 여러 변수에 따라 새로운 중앙 정부의 성격과 의회의 구성 문제에 있어서는 이해관계가 엇갈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새로운 정부가 “공화주의 (Republicanism)”의 이념에 기반해야 한다는 데에는 상당한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부패하고 전제적인” 영국 정부 혹은 절대 군주의 자의성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반발이 독립 혁명의 배경이 되었기때문이다.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의 산물인 미국 헌법의 역시 권력이 한 곳으로 집중되지 않도록 하는 견제와 균형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시대적 맥락에 따라 다소 다른 의미를 지니기도 하겠으나, 공화주의는 권력의 원천이 (전제군주와 같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적 이해 관계를 공유하는 “시민들”에게 있다고 본다. 공화주의가 이야기하는 시민은 종종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적으로 공공선을 위해 헌신하는 한편 정치에 참여하는 덕스러운 시민 (Virtuous Citizen)으로 개념화되곤 한다.

하지만 건국시기 공화주의가 암묵적으로 가정했던 덕스러운 시민의 선결 요건은 백인, 중산층, 남성의 교집합이었다. 아메리칸 원주민들은 공동체의 성원이 아니었고, 미국의 이해관계와 배치되었다. 흑인 노예는 시민이 아니었다. 일례로 흑인 인구를 1인당 3/5명으로 취급했는데, 흑인인구의 대다수가 거주했던 남부주들은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할 때는 흑인 인구가 계상되기를 원했지만 납세를 위해서는 흑인을 인구로 계산하기 원치 않았고, 북부의 이해관계는 정 반대였던 탓에 나온 기가 막힌 타협이었다. (백인 중산층) 여성들에게는 자녀들을 공화주의가 추구하는 덕스러운 시민으로 양육하는 공화주의 모성 (Republican Motherhood)의 역할이 요구되었을 뿐이다.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퇴역군인 대니얼 셰이스와 매사추세츠의 농민들이 전쟁직후 불안정한 경제상황으로 만연했던 채무로 인한 투옥을 중단해달라고 요구했을때, 이들은 “폭도”취급을 받았다.

신생 미국의 철학적 기반을 제시하는 독립 선언문은 만민 평등(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과 천부 인권적 자유(조물주로부터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같은 가치를 근간으로 하지만, 이 때 모든 “사람”의 범주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세기 반 전, 그때는 그랬다. 아직은 그랬다.

그리고 오늘.
알링턴 어느 공원 언덕에 올라 독립 기념일 불꽃놀이를 보았다. 기분좋은 바람을 맞으며 이번 주에는 자유, 천부인권, 공화주의 그리고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봐야지 마음 먹었었다. 그리고 컴퓨터를 키고 패트릭 헨리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라는 구절을 썼다. 그리고 꽤 여러 시간 책상앞에 앉아 있었는데 단 한줄도 진행하지 못했었다. 자유,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비장함이 오늘따라 너무 착잡했던 탓이다.

한진 중공업측의 일방적인 172명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를 철회하라며, 해고는 살인이라며 해고 노동자 김진숙씨가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지가 벌써 6개월이 훌쩍 넘었다. 그녀는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죽어서 내려오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한 구절을 오늘 쓰고 나니, 행복할 수 있는 권리, 일할수 있는 권리,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는 절규로 번역되어 돌아오는 것이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공사를 수주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한 한진중공업은 공사를 수주하지 못한 경영의 책임을 졌어야할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성과급을 나누어가졌다. 그리고 농성중인 해고노동자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공권력이 투입되었다.

동계 올림픽 평창 개최가 확정되었다고 한다. 전국민이 환호한다(고 언론이 보도한다). 감격에 겨운 외교부 모 인사는 “올림픽 개최 결정이 못마땅하면 우리 국민 아니죠”라고 했다는데, 나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대규모 국제 스포츠 행사가 국가 인지도 향상에는 도움이 될 지 몰라도 지역민의 삶과 경제에는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평창 올림픽 개최 결정이 그닥 감격스럽지도 않았다. (아마 그 분께 나는 “우리 국민”이 아니었을 게다.)

이러저런 뉴스 끝자락에 모모 재벌인사들이 동계 올림픽 유치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보도된다. 하나같이 경제사범들인데, 평창 올림픽 유치 활동을 해야한다는 명목으로 사면 받았던 이들이다. 그런 그들과 한진중공업의 해고 노동자들 중에 누가 더 대한민국의 공공선을 위해 헌신해 온 국민들일까,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 공화국 대한민국의 “국민”은 혹시 권력과 부를 가진 소수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던걸까?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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