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16) |
보스톤코리아 2024-02-19, 11:37:36 |
신기의 격검술을 보유했던 전설적인 인물 문노에게는 휘하에 따르는 낭도들이 많이 있었다. 그의 밑으로 들어와서 무도를 전수 받겠다는 낭도들의 숫자는 이미 조정에서 세운 풍월주의 낭도들을 상회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설화랑이 7세 풍월주에 재임하던 시기(572 ~ 579년)에는 자연스럽게 두 파의 화랑도가 존재하고 있었다.471) 문노를 따르는 낭도들은 호국선이라 불렀고, 설화랑을 따르는 낭도들은 운상인이라 불렀다. 문노는 537년 무렵에 태어났다. 그는 17세 무렵인 554년, 김무력(김유신의 조부이며 진흥왕과 사도왕후의 딸인 아양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래서 후일 김유신이 가야파라는 신분때문에 의도적으로 김춘추에게 접근하였다는 625년 정월 보름날 축구 이야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도 만명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럼 만명은 누구인가? 만명의 부모는 김숙흘종과 만호태후이다. 숙흘종과 만호는 남매간이다.472) 즉 그들의 부모는 진흥왕과 같은 입종과 지소이다. 만호는 조카인 동륜태자와 혼인하여 김백정, 김백반, 김국반을 낳았다. 장남 백정이 제26대 진평왕이다. 김유신의 증조부 구형왕이 가야에서 왔지만 신분상 진골의 골품을 받았고, 아들 무력부터 공주와 결혼하였다)을 따라 출정하여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를 쳤다. 555년에는 북한北漢으로 가서 고구려를 쳤다. 또한 557년에는 국원國原(현제의 충주시)으로의 출정과 북가라北加羅 등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문노에게는 돌아오는 ‘논공행상’은 아무 것도 없었다. 수하의 낭도들이 많은 불평을 하였지만, 그는 “대저 상벌이란 소인의 일이다. 그대들이 나를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어찌 나의 마음을 그대들의 마음으로 삼지 않는가?” 라며 오히려 부하들을 위로하였다. 561년 세종이 6세 풍월주에 오르면서 문노를 찾아갔다. 그때까지는 문노가 연상이었지만 왕자에 버금가는 전군의 신분인 세종를 섬기며 그를 따라 출정하였다. 세종은 문노를 더 이상 신하로 삼을 수 없으니 형이 되어 모든 낭도를 이끄는 풍월주인 자신을 도와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이에 문노 역시 허리를 굽혀 심복되길 맹세하였다. 곧 세종은 여러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문노에게도 보답을 내려달라고 진흥왕에게 청원하였다. 왕은 그 청을 받아서 급찬(9등급)의 관위를 내렸지만 문노는 받지 않았다. 동시에 사도왕후, 미실 등이 문노의 명성을 익히 알고 불러서 몰래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문노는 자신이 이끄는 호국선의 낭도들을 위하여 도움은 받았지만 사사롭게 받지는 않았다. 576년 진지왕 즉위 후, 왕후인 지도知道가 일길찬(7등급)의 관위를 내리며 발탁하려 하였지만 거절하였다. 이렇듯 왕이나 왕후가 내리려는 벼슬까지 거절한 문노였는데, 진지왕 폐위거사에는 기꺼이 동참하였다. 거사의 주동인 사도태후(진흥왕의 왕후)가 세종에게 문노(의 세력)를 포섭하라고 밀조를 내렸다. 심복임을 맹세했던 문노는 세종을 따랐고, 동참하여 진지왕 폐위에 일조하였다(579년). 그 공으로 그는 아찬(6등급, 당시 그의 6두품 신분으로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관위이다. 그는 거칠부의 딸인 윤궁을 아내로 맞은 후 진골의 골품을 받았다)의 벼슬을 받았다. 비로소 미실에게 총애를 받아 선화仙花의 위位도 얻었으니, 곧 8세 풍월주가 되었다. 471) 원화이자 설화랑의 총주寵主인 미실이 설화랑에게 풍월주의 위位를 문노에게 물려주라고 할 때, 설화랑이 총주의 명을 기꺼이 따르면서 문노에게 그 의향을 전하자, 문노는 국선(호국선護國仙의 수장)이 결코 풍월주보다 아래가 아닌데, 어떻게 이어받느냐고 반문하는데서 당시 문노의 호국선파와 설화랑의 운상인파의 규모와 위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설화랑이 “국선이 비록 전왕(진흥왕을 말한다)이 설치한 것이지만 풍월정통은 아니다” 라고 반격한 대목에서, 문노를 따르는 낭도들의 규모는 컸지만, 결국 정통 화랑도의 맥은 풍월주가 이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문노 역시 나중에 설화랑을 이어 8세 풍월주에 올랐다. 당시 문노를 따르는 낭도들은 모두 격검술에 능했고, 진골귀족부터 한미한 가문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상하를 막론하고 모두 그에게 가서 신기의 무도를 전수받았다. 대표적인 진골귀족으로는 김흠운金欽運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소년 시절에 문노의 휘하에서 낭도가 되었다. 늘 이름을 남기고 죽어간 화랑들의 옛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고, 자신도 그들처럼 싸우다가 명예롭게 죽겠다고 다짐하면서 무도를 수련하였다. 결국 그는 655년 조천성助川城(현 충청북도 영동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김흠운은 낭당대감으로 출정하여 병졸들과 함께 풍찬노숙하였고, 임전무퇴의 화랑도정신으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당시 그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사위였다. 부인 요석공주와 낳은 딸 은 제31대 신문왕의 계비로 신목왕후이며, 그들의 아들들이 제32대 효소왕과 제33대 성덕왕이다. 김흠운의 부모는 김달복과 김정희(김유신의 동생)이다. 김흠운의 전사로 졸지에 과부가 된 요석공주는 나중에(655 ~ 660년 사이) 원효대사의 부인이 되어, 이두吏讀를 창시한 신라의 대문장가 설총을 낳았다. 472) 화랑세기에서는 만호의 부모가 4세 풍월주 이화랑과 지소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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