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18세 풍월주風月主 춘추공春秋公(3) |
보스톤코리아 2020-10-19, 11:18:01 |
김춘추는 문희(문명왕후)와 함께 둘째 딸이자 김유신의 부인이 된 지소공주智炤公主를 낳았다. 즉 지소공주는 외삼촌인 김유신에게 시집갔는데 당시 김유신의 나이 60세였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5세 풍월주 유신공조에서 다루었다. 다음은 김춘추의 막내딸 요석공주瑤石公主, 그녀는 원효대사의 부인이 되어 설총을 낳은 것으로 유명하다. 625년경 어느날, 서악西岳에 올라 경성京城이 큰 물로 가득한 것을 보고 불길하다고 생각하여, 비단치마 한폭으로 왕비가 될 꿈을 꿈으로 날려버린 보희, 그래도 ‘헛꿈’은 아니었는지 후일 보희도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부인(영창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요석공주를 낳았다. 요석공주는 원효대사와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하여 남편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 김흠운金歆運은 655년에 조천성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김흠운의 부모는 김달복과 김정희(김서현의 딸, 김유신의 동생)이다. 김흠운은 후일 688년 ‘흠돌의 난’ 으로 처형된 김흠돌과 형제이기도 하다. 김흠운은 8세 풍월주 문노의 휘하에서 무예를 익혔으며, 보국충정의 이름을 남기고 간 화랑도들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명예롭게 죽을 수 있는 화랑도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655년 조천성 전투에서 백제군에 맞서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일전하다가 전사하였다. 요석공주와 김흠운은 딸 둘을 두었는데 둘째딸이 문무왕(김법민)의 장남 소명태자와 결혼했다. 하지만 소명이 일찍 죽었다, 그리고 소명의 동생 정명태자와 재혼하였다. 그 후 정명이 제31대 신문왕으로 즉위하니 그녀는 신목왕후가 되었다. 신문왕과 신목왕후의 장남이 효소왕이고 차남이 성덕왕이다. 한편 월성의 남쪽 복사꽃이 만발한 남도南桃에는 선남선녀의 화랑도와 유화遊花들이 무예도 익히고 자연을 벗삼아 호연지기를 펼치고 있었다. 그 중 빼어난 미모의 유화와 늠름한 화랑이 상통하여 잉태를 하였는데 그들은 서로 그렇게 헤어졌다. 부모를 만나 허락을 받아서 결혼을 한다던 낭도는 그만 다음날 변방을 지키러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유화는 14년을 기다렸다. 낭도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삼국사기 권48, 열전 설씨조에 나오는 ‘가실과 설씨녀’ 의 이야기는 아마도 이 설씨 유화의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많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 시절, 아버지를 대신하여 변방으로 수자리를 가게되는 가실과 그의 사랑하는 연인 설씨녀는 거울을 반으로 쪼개어 가지고 있으면서 3년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3년이 가도 가실은 돌아오질 않았다. 마침내 6년만에 돌아온 가실의 몰골이 너무나 초라하여 알아보지 못하고 거울을 맞추어본 뒤, 가실인걸 알고 혼인하였다). 다시 화랑세기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설씨녀는 14년전 하루밤의 사랑으로 임신한 아이를 낳아서 혼자 기르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구리지(사다함의 아버지)가 그 마을을 지나가다가 동구밖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보고 범상치 않음을 알고 부모를 찾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고 있었다. 당시 설씨녀는 30살 가량이었다. 16세에 유화가 되어 좋은 낭도를 만나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아서 14년이나 그 낭도를 기다리며 살고 있었다. 부모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라고 하였지만 설씨녀는 따르지 않고 홀로 살면서, 낭도의 성도 몰랐으니 자신의 성을 따라 아이의 이름은 설성이라고 하였다. 설씨녀는 비록 천복賤服을 입고 가난하게 살고 있었지만 먼지더미에 있는 백옥과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구리지가 통정을 하려고 했다. 그러자 설씨녀는 완강히 거부하며 그간 마을의 많은 젊은이들이 범하고자 했는데, 자신의 의지와 기개를 굴복시키지 못해 서로 경계하고 보호해 주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하루아침에 그걸 허무르면 마을의 무뢰한 자들이 범하여 내일이면 어떤놈의 소유가 될지 모를 것이고, 그럼 우리 모자는 죽어야 된다며,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모자를 불쌍히 여겨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자 구리지는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구리지의 부모는 비량공과 벽화부인이다. 벽화는 비처왕의 후궁이었다가 500년 말경에 비처왕이 죽고 지증왕 즉위 후, 그의 아들 김원종, 후에 법흥왕, 의 후궁이 되었다. 벽화가 비처왕의 후궁일때 비량과 측간에서 상통하여 구리지를 낳았다). 그러자 설씨녀는 마음을 열었고 구리지의 첩이 되었다. 구리지는 그녀의 초막을 헐고 새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 동네를 향鄕으로 봉하고 그 향을 ‘대행大幸’ 이라고 이름 지었다. 설씨녀의 아들 설성은 구리지의 신하가 되었다. 구리지는 그의 출신이 한미한 것을 염려하여 급간 설우휘의 가문에 소속 시키고 사지舍知(13등급, 원문에는 사舍 자가 탈자 되었는데 지知로 끝나는 벼슬은 13등급 사지 밖에 없다)의 벼슬을 주었다. 구리지는 자주 출전을 하였는데 그 사이 구리지의 부인 금진낭주는 설성과 사통을 하였다. 후일 구리지가 전장에서 전사하자 그들은 부부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7세 풍월주가 된 설원랑(설화랑)이 태어났다. 설화랑이 준화와 혼인하여 장남 웅雄과 차남 잉피仍皮, 적녀 정금낭주淨金娘主를 낳았다. 잉피가 설담날을 낳았으며, 담날은 조씨부인과 혼인하여 원효대사(속명 설사薛思)를 낳았다. 설담날은 629년 ‘낭비성 전투’ 에서 전사하였다. 그리고 원효가 김춘추의 셋째딸 요석공주와 혼인하여 설총을 낳았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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