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견디는 방식(9) |
보스톤코리아 연재소설 |
보스톤코리아 2018-09-24, 10:41:17 |
오빠가 육 개월을 따라다녔지만 그녀는 아이를 보게 해 주는 거기까지만 허락했다. 이혼도 필요 없었다. 그 서류에 도장 찍는 따위의 일이 뭔 소용이냐고 했다. 그녀는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잘 살아 냈지만 오빠는 날로 망가져 갔다. 엄마는 늘 입에 그녀를 향한 저주를 달고 살았지만 난 덤덤하게 가족의 삶을 바라본다. 작가란 직업이 때로는 좋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의 일도 하나의 이야깃거리로 보게 되는 약간의 소시오패스적인 마음을 품게 되어 깊은 슬픔과 절망은 다 종이 위에 담긴다. 반면 내 남편은 모든 사회적 역할을 다 놓아 버리고 철저하게 가족의 평화주의자로 돌아섰다. 드라마 극본에 처음 응모한 날 나는 혼자 술을 홀짝거리며 포장마차에서 벚꽃이 흩날리는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내가 읽었던 수많은 소설들의 힘을 빌려 어떤 상황이든 이야기로 풀려 버리는 습관이 나를 자연스럽게 드라마를 쓰게 했다. 완성된 문장을 위해 담금질을 할 때는 깊이 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 길을 찾는데 일 년이 걸린다면 글쓰기를 전공하는 사람들은 그 길을 찾는데 삼십 분 만에 가능하다는 알게 되었을 때, 난 이 지리멸렬한 과정이 꼭 내게 보상을 해 주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내가 소주잔을 비우자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내 술잔에 소주를 채워 준다. 난 아무 말없이 그의 옆얼굴을 한번 보고는 이내 술잔 속에 일렁이는 전구의 불빛을 보았다. 옆에 앉아 있는 남자의 술잔이 비었다. 나는 그의 술잔에 그의 소주 병을 들어 따라 준다. 네 잔 정도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의 술병을 반병 정도 비웠을 때 남자가 내 옆얼굴을 한참 본다. “오늘 드라마 원고 응모하셨죠? 저도 했어요. 방송국이 집하고 가까워서 직접 접수하러 왔다가 소주나 한잔 마시려고 들렸어요. 그쪽이 들어오길래 아까 방송국에서 본 얼굴인가 싶어 유심히 봤습니다. 탈고 한 뒤에 느끼는 이 묘한 느낌, 그쪽도 마찬가지죠?.” 그는 술을 별로 많이 마시는 사람은 아니었다. 소주 한 잔을 네 번에 나눠 마신다. 손이 가늘고 길다. 심한 일은 안 해본 사람이다. 아버지와 오빠들의 손은 투박하다. 늘 손을 많이 쓰니 투박할 수밖에 없는 남자들만 봐서 가늘고 흰 손을 가진 남자가 특별해 보인다. “네”, 난 짧게 대답하고 그는 여러 가지를 묻는다. 난 그가 성가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와 말을 오래 섞을 만큼 그는 내 호기심을 유발하지 못했다. “난 라이터에 집착을 하는 남자의 심리를 좇아가는 좀 난해한 시나리오예요. 대중성이 없어서 당선되기 힘들 거예요. 그쪽은요?” “전 아주 대중적인 내용이에요. 여자들의 유리구두 신드롬을 건드리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요.“ 그렇게 대본 이야기로 시작해서 두 시간을 대본 이야기만 하다가 헤어졌다. 내 시나리오가 당선이 되고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반응도 괜찮았다. 몇 년 후 초대권 하나를 받았는데 내용이 라이터에 관한 것이었다. 대학 공부를 포기한 이후로 내 감정의 변덕은 더 이상 나도 타인도 괴롭히지 않았다. 현실은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다. 현실이란 한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똑같은 짐의 무게일 뿐이다. 한 개인의 몸집이 크냐 작으냐에 따라 그 무게는 무겁거나 가볍게 된다. 내가 짊어지고 있는 무게는 서민들의 삶 속에서는 다 고만 고만한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것이었다. 나를 이루고 있는 내 몸집의 정체, 내 현실의 정체는 내 열망을 단 한 가지도 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깨닫는 것은 고통이었지만 일찍 알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현실에서 적을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 부모와 오빠들에 대한 나의 독기는 사라졌다. 라이터에 관한 연극을 보고 있는데 남자가 옆에 와서 앉는다. 몇 년이 흘렀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칠 개월을 남자는 나를 쫓아다녔고 나는 그와 결혼했다. 그는 결혼 후 딱 세 번 연극 시나리오를 썼다. 흥행에도 실패하고 극단에서는 남자의 시나리오를 더는 원치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사회에서 거세되었으나 그는 살아남는 방법으로 살림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내가 방에서 꼼짝 못하고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아무 소리 없이 잘 해 줬다. 나도 별 불만이 없다. 누군가는 해야 할 살림이다. 오히려 남자랍시고 아무 것도 안 하는 남자가 아닌 것에 감사하며 살았다. 26년을 그렇게 살아서 그런지 난 집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고 그는 밥을 차린다. 아무런 불만이 없었지만 한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와 섹스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일 년에 한번 할까 말까 한 것도 종종 실패 하곤 했다. 문제는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었다. 내 몸은 빳빳하게 굳고 마른 땅처럼 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유희주 작가 유희주 작가는 1963년에 태어나 2000년『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인간과 문학』에 소설 『박하사탕』을 발표하며 소설 작품 활동도 시작했다. 시집으로 『떨어져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엄마의 연애』, 산문집으로 『기억이 풍기는 봄밤 (푸른사상)』이 있다. 유희주 작가는 매사추세츠 한인 도서관 관장, 민간 한국 문화원장, 레몬스터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코리안릿닷컴(koreanlit.com)을 운영하고 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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