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견디는 방식(7) |
보스톤코리아 연재소설 |
보스톤코리아 2018-09-10, 14:42:41 |
‘난 까마귀 같은 사람이죠’ 까마귀는 분명 그 남자일 것이다. 방 안에는 몇 벌의 옷이 있고 작은 상자 안에 남자의 팬티가 있다. 아마도 빨랫감을 놓아두는 상자인 모양이다. 남자의 팬티를 보는 순간 은미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자기혐오가 꾸역꾸역 차올랐다. 궁상맞은 삶을 털어내려고 엄마 돌아가신 이후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던가. 한데 이 남자는 이 시대에 저 팬티 같은 존재 아닌가. 시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보호하는 그러나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저 팬티. 은미는 팬티처럼 벗겨져서 빨랫감으로 던져질 수도 있는 남자가 처음으로 현실로 느껴졌다. 남자를 은미의 현실 속으로 들여놓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은미는 조직도를 가방에 넣고 나오려다가 돌아서서 책꽂이를 바라보았다. 가장 위험해 보이는 책 몇 권을 빼서 가방에 넣었다. 안국동 개미굴 집을 빠져나오는 동안 심장이 터져 나가는 듯했다. 모든 남자들이 형사들로 보였다. 남자의 물건을 내밀며 은미는 단호하게 말한다. “다시는 이런 일 나에게 시킬 수 없어. 난 더 이상 이 찻집에 안 올 거야.” 보름이나 지났을까. 은미는 알 수 없이 앓았다. 온몸에 뜨겁게 열이 차올랐다. 견딜 수 없이 남자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마음을 확인 한 것이다. 고작 몇 달 만났는데 겨우 손만 잡았는데 남자 때문에 숨을 쉴 수 없는 자신을 향해 꼴값하지 말라고 중얼거리며 다녔다. 출근도 겨우 했고 일 처리 능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회사 내에서 활기찬 걸음걸이로 유명한 은미는 병든 병아리처럼 걸음걸이가 느려졌다. 또한 그 남자를 생각하면 몸의 기운이 아래로 쏠리는 현상도 있었다. 한 번도 섹스를 해 보지 않았다. 그 남자가 그리운 것이지 그 남자와 섹스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그가 그리운 만큼 은미의 아래도 뜨거워졌다. 처음 겪는 이런 현상을 거부하느라 한 달 사이 5킬로 그램이 빠졌다. 보는 사람마다 아프냐고 묻는다. 비가 오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져서 퇴근 시간 무렵 몇몇의 직원들은 약속을 취소하는 전화를 하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우산 색깔이 참 예쁘게 무리 지어 걷는다. 어둑어둑한 저녁 가로등 불빛 속으로 빗물들이 사정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가끔 비가 와도 부나방 들은 제 날개를 불빛 속에서 더욱 빛내며 미친 듯 가로등 주위를 맴돈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억수로 오더니 가로등 주위가 조용하다. 은미는 그렇게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 남자를 사랑하면 내 인생은 끝장이다’라고 아무리 스스로를 설득해도 몸과 마음은 거의 통제가 불가능해졌다. 이렇게 감정적인 사람인가? 내가? 한 번도 연애를 해 보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인가? 너무 외롭기 때문일까? 오래도록 사람의 온기를 느끼지 못했지만 그것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목표가 있었으니까. 제대로 된 자기 위치를 갖는 것이 이토록 절박한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부모의 보호 아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삶을 꾸리는 자들은 절대 알 수가 없다. 정상적인 구성원이 되어 안전한 가정을 갖는 것, 이 목표에 비상등이 켜진 것이다. 남자를 사랑하고 함께 결혼을 한 후의 미래를 생각하면 은미의 희망인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은미는 결심한다. 이 남자를 사랑하겠다. 그러나 결혼은 하지 않겠다. 은미가 비옷을 입고 우산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간다. 남자와 만나던 찻집은 이곳에서 십여 분 걸어야 한다. 길 위로 흐르는 빗물이 발을 적시고 종아리를 적신다. 내리는 비는 허벅지와 엉덩이를 적신다. 바람이 불면 더 많이 젖는다. 아무리 비가 와도 젖지 않는 몸의 한 부분은 우산을 든 오른손 주위. 심장 그리고 얼굴이다. 찻집으로 걸어가며 심장을 꺼내 빗물에 식히고 싶었다. 심장은 뜨겁게 폭주하듯 뛰었다. 천천히 걷는 것 만이 마음을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거리에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이런 폭우 속에서 천천히 걷는다. 그때 지하철 환풍기가 있는 곳에 비를 철철 맞으며 한 여자가 노래를 늘어지게 부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비를 피해 건물 처마 밑에 있던 사람들은 그 여자의 노래를 듣는다. 청승이 하늘을 울리는지 땅을 울리는지 이 비는 저 여자의 노래와 너무 어울린다. 은미는 그 여자 옆에 앉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그 여자의 처량함에 얹혀 마구 청승을 떨고 싶었다.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임희숙이 불렀던 저 노래를 스물둘 정도 되어 보이는 앳된 여자아이가 청아하게 부른다. 청아하게 부르니 더 슬프다. 한 달하고도 보름 만에 찻집 문을 연다. 이미 온몸이 젖었다. 유희주 작가 유희주 작가는 1963년에 태어나 2000년『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인간과 문학』에 소설 『박하사탕』을 발표하며 소설 작품 활동도 시작했다. 시집으로 『떨어져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엄마의 연애』, 산문집으로 『기억이 풍기는 봄밤 (푸른사상)』이 있다. 유희주 작가는 매사추세츠 한인 도서관 관장, 민간 한국 문화원장, 레몬스터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코리안릿닷컴(koreanlit.com)을 운영하고 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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