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37 |
화랑세기花郞世紀, 8세 풍월주風月主 문노文弩(27) |
보스톤코리아 2018-08-06, 10:32:41 |
문노와 윤궁이 결혼식을 하고 문노의 사후 그의 화상이 봉안된 신궁, 그리고 그 신궁에 설치된 선단仙壇에 대해서 좀더 살펴본다. 삼국사기에는 신궁이 소지왕 재위시인 487년에 설치되었다는 기록과 다음 왕인 지증왕 재위시에 설치되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는 신궁의 설치연대를 소지왕이 재위(479 ~ 500)한 5세기 말이나 지증왕이 재위(500 ~ 514)한 6세기 초가 (국사 시험을 칠때는) 정답이다. 하지만 삼국유사와 화랑세기를 함께 자세히 읽어보면 신궁의 존재는 그 보다 100여년이 앞선다. 화랑세기(5세 풍월주 사다함조)에는 내물왕의 신궁이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 내물왕은 356년에서 402년까지 재위하였고, 그의 아들 눌지왕은 417년에서 458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그 사이에는 내물왕의 사위 실성왕이 재위하였다. 눌지왕 재위시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 눌지왕의 명으로 박제상이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가 있던 왕의 동생들을 귀국케 하였다. 박제상(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나온다. 여러가지 기록을 종합해 보면 박제상의 가계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더 정확한 것으로 사료되며 결과적으로 그의 성이 박씨임이 틀림없다) 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으뜸가는 충신 가운데 한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본기 눌지왕 2년(418년)에 간략하게 실려 있고, 열전에는 상세하게 실려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내물왕과 김제상이라는 제목으로 아주 자세하게 실려 있다. 두 사서의 공통된 내용을 보면, 눌지왕 때 왕이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잡혀가 있는 두 동생을 데려오고자 하였다. 신하들이 삽량주(현재의 경남 양산 지방)의 태수 박제상이 적임자라고 천거하였다. 그래서 박제상은 고구려에 먼저 가서 왕의 동생 복호(삼국유사에는 보해로 나온다)를 데려오고, 다음은 왜국으로 가서 작은 동생 미사흔(삼국유사에는 미해로 나온다)을 신라로 귀국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그는 왜왕의 분노를 사서 화형을 당했다. 위의 내용이 간략한 사건의 전말이다. 여기서는 신궁에 관하여 관찰해보기 위하여 눌지왕이 고구려와 왜국에 오랫동안 가있던 동생들 보해와 미해를 구하기 위하여 누가 적임자일까 신하들에게 자문을 구하면서 한 말을 인용한다. “예전에 아버님께서 백성의 일을 지성껏 생각하신 까닭에 사랑하는 아들을 멀리 왜국에 보냈다가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뜨셨소. 또 내가 왕위에 오른 뒤에 이웃나라 군사가 매우 강해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는데 고구려만이 화친을 하자는 말이 있어 나는 그 말을 믿고 친동생을 보냈소. 그런데 고구려에서도 억류해 두고 돌려보내지 아니하오. 나는 비록 부귀를 누리고 있으나 일찍이 하룬들 잠시나마 아우를 잊지 못해 울지 않는 날이 없었소. 만일 두 아우를 만나보고 함께 선왕先王의 사당에 고하게 된다면 백성들에게 은혜를 갚겠는데, 누가 그 계책을 이룰 수 있겠소?”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선왕先王의 사당’이다. 물론 화랑세기를 읽지 않았거나, 사당 또는 신궁에 관심이 없다면 무심코 넘어가기도 쉽고 동시에 복호와 미사흔을 귀국시키는데는 그리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귀국한 뒤엔 물론 부왕의 사당에 고하겠지만 사당에 고하기 위하여 구출하는 것은 아니였으니까….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물왕의 사당과 화랑세기에 기록된 내물신궁은 같은 곳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화랑세기는 신라인이 신라의 역사를 기록하였고, 삼국유사는 고려인이 800여년이 지나서 1281년에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이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신궁의 주인인 주신主神의 기록이 없다. 하지만 화랑세기에는 거의 모든 신궁의 주신이 밝혀져 있다. 결과적으로 신라의 신궁에 관한 개념과 설치연대 등의 역사 재정립이 필요치 않을까? 그리고 이 신궁은 포석사라는 사당과 짝을 이루고 있었다. 견훤이 신라를 침공했을 당시 경애왕이 유희를 즐겼다고 기록되어 있기에 그간 유희의 장소로만 알려졌던 포석정이 분명 문노가 살았던 시대와 삼국을 통일할 무렵에는 신라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였다. 견훤이 침공했던 음력 11월 엄동설한에 야외에서 유희를 즐겼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경애왕이 귀족과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라의 위급함을 구해달라고 조상신/또는 천신에게 발원하러 나가지 않았을까? 4세 풍월주 이화랑조에는 신궁이 발원의 장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신궁에는 선단仙檀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곳에서 대제大祭를 올렸다. 신라의 대영웅 문노가 죽은 뒤 그의 화상이 포석사에 모셔졌고, 각간으로 추증된 뒤 선단에서 대제를 올렸다. 누구에게 올렸을까? 신궁대제의 주인, 그 주신主神은 아마도 하늘일 것이다. 화랑세기에서는 하늘을 선仙으로 표현했다. 화랑세기 서문의 첫문장이 “화랑은 선도仙徒이다” 이다. 문노의 부인 윤궁은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 선仙이 되었다고 기록된 것은 바로 그 사상을 따름이 아니었겠는가?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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