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12. 시팅불과 운디드니 대학살 (1)
보스톤코리아  2016-03-14, 11:47:33 
크레이지 호스의 최후 (계속)
곳곳에 심어 놓은 인디언 프락치로부터 이 말을 전해들은 크룩은 당장 크레이지 호스를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크레이지 호스는 크룩이 있는 로빈슨 요새로 연행됐다. 그날은 너무 늦어 크룩을 만날 수가 없어서 그를 잡아갔던 군인들이 그의 신병을 주재소 경찰관에게 넘겼다. 크레이지 호스가 그 경찰관을 보고는 크게 놀랬다. 왕년에 크레이지 호스 곁에서 백인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용맹을 뽐내던 작은 거인(Little Big Man)이 백인에게 매수되어 여기서 동족을 핍박하는 경찰로 변신해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작은 거인과 케닝턴(James Kennington) 대위가 호송하여 경찰 유치장으로 데리고 갔다. 철창살 안에서 짐승을 잡을 때에나 쓰이는 덫에 발이 묶인 사람들을 보는 순간 크레이지 호스는 순간적으로 폭발하여 호송하던 군경과 심한 격투를 벌였다. 이 때 옆에 있던 젠틀스(William Gentles) 일병이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대검으로 크레이지 호스의 복부를 찔렀다. 크레이지 호스는 이렇게 1877년 9월 5일 밤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또 하나의 인디언 큰 별이 떨어져 부족의 곁을 영원히 떠나갔다. 그러나 크레이지 호스는 사후 200년 쯤 지나면 지상 최대의 석상으로 다시 태어나리다.

그해 가을 인디언들은 네브래스카 주거지역을 떠나 북동쪽에 있는 다코타의 척박한 땅으로 옮겨갔다. 가는 도중에 일부 인디언들은 대열에서 빠져나와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시팅불이 있는 캐나다로 향하기도 하였다. 이탈한 인디언 중에는 미친 말의 부모도 있었다. 그들은 운디드니(Wounded Knee) 근처를 지나다가 크레이지 호스의 유골을 땅에 묻었다.

12. 시팅불과 운디드니 대학살
시팅불, 캐나다 망명을 끝내고 미군에 투항
미군에 쫓겨 캐나다로 들어간 시팅불 무리들은 캐나다에서도 계속하여 고난을 겪고 있었다. 캐나다가 독립 전이라서 영국식민지 통치를 계속 받고 있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영국정부와 상대하였는데, 캐나다 측은 인디언들이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서 미군과 싸운다든지 하는 말썽만 부리지 않고 들소사냥이나 하면서 조용히 산다면 굳이 쫓아내지는 않을 것이나, 캐나다 내에 있는 인디언 부족에게 해 주고 있는 정부지원은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추위와 굶주림을 참다못한 부족민 중에는 시팅불을 떠나가는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다. 1881년 봄에는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 쓸개(Gall)도 떠났다. 

드디어 7월 19일 시팅불은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부족민 180여명을 거느리고 북다코타의 부퍼드요새(Fort Buford)로 들어왔다. 그러나 당초에 스탠딩 록(Standing Rock)에 있는 훙크파파족의 에이전시로 보내고 투항할 경우 사면해 주겠다는 약속을 다 깨어 버리고 랜들 요새(Fort Randall)에 포로로 감금해버렸다. 시팅불은 1883년에야 스탠딩 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팅불이 투항해온지 십여 일 뒤에 로즈버드 에이전시(Rosebud Agency)에서 브룰레지파의 추장 점무늬 꼬리(Spotted Tail)가 까마귀 개(Crow Dog)라는 이름을 가진 동족 인디언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팅불은 미국 측이 다루기 껄끄러운 추장을 제거하고 보다 온건한 추장과 상대하기 위하여 까마귀 개를 매수하여 사건을 저질렀다고 믿었다. 암살사건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수그러들면서 시팅불의 투항이 더 큰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여러 주거지역에 흩어져 수용돼 있던 인디언 추장들이 인사차 랜들 요새로 찾아오고 전국 각지에서 신문기자들도 몰려왔다. 1876년의 리틀 빅혼강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지금은 초라한 패장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그에 대한 부족민들의 존경심은 여전했다. 시팅불은 인디언에게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명인사가 돼 있었다. 당시 미국정부측은 시팅불을 전체 수우족의 대추장으로 알고 있었다. 

수우족은 여러 지파로 나누어지며 각 지파별로 추장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잘 몰랐던 것 같다. 1885년에는 인디언보호구역을 떠나서 버펄로 빌 서부극 쇼(Buffalo Bill Cody’s  Wild West)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그의 사진과 서명에 대하여도 대가를 받아 번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고 한다. 그에 관한 재미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 1884년 북태평양대륙횡단철도(Northern Pacific Railway)완공기념식에 특별연사로 초청되어 축사를 하였는데 연설 도중에 라코타 말로 백인들에게 심한 욕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시 또 인디언의 땅 절반을 뺏어가다
미국정부는 1882년에 수우족의 몫으로 그 때까지 남겨져 있던 땅을 조각내어서 그 중의 반을 사들이겠다는 계획에 따라 대표들이 인디언 주재소로 와서 인디언들을 회유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시팅불은 부족 추장들에게 절대로 팔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대표단은 서명한 인디언의 숫자를 채우려고 7살짜리 어린아이의 서명을 받기도 하여 언제나 그래 왔듯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고 돌아갔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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