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아침에 듣는 닭울음소리
보스톤코리아  2007-04-10, 08:10:26 
조태연 (보스톤 중앙교회 담임)


내 어릴 적 마당 뒤꼍으로는 허름한 닭장이 있었다. 따스한 봄날이나 여름철에는 언제나 닭장 문을 열어 순진한 닭들을 풀어주었다. 온종일 햇볕 아래 마당을 거닐며 모이를 쪼아 먹으라고 말이다. 그러다가도 저녁 즈음이 되면 으레 닭들을 몰아 닭장에 넣었다. 해가 서산을 넘고 뜰 안에 땅거미가 드리우면 닭들은 어느새 홰에 올랐다. 그리곤 두 발로 선 채 눈썹을 닫고 ... 세상은 이내 하얗게 잠이 들었다. 해가 질 때 그 이른 시간에 벌써 잠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내 어릴 적 기억에 세상은 닭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한 참 후에라야 밝아왔다. 닭들은 어둠 속에서도 동녘 너머의 세상을 보는 혜안이 있는 것일까? 해의 죽음과 함께 가장 일찍 잠이 든 그 동물은 가장 일찍 일어나서 해의 새로운 재생(再生)을 노래하는 것이다. 한 날의 죽음이 닭장에 먼저 왔다면, 새 날의 빛도 닭의 울음소리와 함께 닭장 안에 먼저 찾아온 것이다. 한 날의 죽음과 부활이 닭과는 무슨 관계라도 있는 것일까?
   유럽의 거리를 거닐 때 교회마다 건물 꼭대기 십자가 위에 달린 황금빛 닭의 형상이 신기했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의 말씀대로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 바로 그 닭이라 하였다(막 14:30). 작은 이해관계 앞에 생명처럼 소중한 의리를 저버릴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의 나약한 의지에 대한 경각심이 아닌가? 때때로 내 안에 선(善)한 의지와 숭고한 결단이 있다 하여도, 작은 도전과 하찮은 유혹 앞에 수이 무릎 꿇는 우리네 실존을 일깨움이 아닌가?
   내 속의 선한 의지와 숭고한 결단을 죽이는 것이 나의 약한 의지만은 아니다. 현대 사회의 구조와 문화 일상은 그 모든 것들을 단숨에 교살시키는 거대한 "짐승"이다. 옛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만이 인류 문명의 유일한 대안인 양 우리를 손짓할 때, 인간은 너나없이 "자본"(맘몬)의 노예가 되고 "맘모니즘"(物神主義)의 악한 영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가 한 낱의 녹슨 엽전 앞에 빛을 잃은 게 어디 어제오늘의 이야기인가(마 6:24)?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惡)의 뿌리"라 아무리 가르친들(딤전 6:10), 그 알량한 지폐 몇 장에 내 속의 선한 의지와 숭고한 결단을 교살시킨 게 몇 번인가?
   때로는 내 연약한 의지로 인하여 인간실존의 그 거룩한 의지를 배반하고, 때로는 밀물처럼 닥쳐오는 세파에 휩쓸려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그 거룩한 의지를 우리는 무엇으로 되살릴 수 있는가? 그것은 대체 우리 안에 살아날 수 있을까? 우리들 살아가는 세상이란 산골짝의 청정(淸淨)한 물처럼 그렇게 정화될 수 있단 말인가?
   겨우내 죽었다가 따스한 봄날에 되살아나는 것들이 있다. 들풀이다. 들녘의 풀은 겨울날 한파에 죽고 두터이 쌓인 눈에 짓눌려 자취가 없다. 하지만 계절의 순환을 따라 봄이 오면 세상의 모든 야생초는 새 생명으로 파릇파릇 돋아난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늘..."(마 6:30). 대문 밖 길섶이며 동구 밖 들판이며 그 어느 곳의 하찮은 풀이라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질서다.
   겨우내 죽었다가 따스한 봄날에 되살아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종자(種子) 곧 씨앗이다. 가을녘 농부의 손이 한 웅큼 벼를 집고 낫을 댈 때, 그리고는 연하여 탈곡기 아래로 볏단에서 볍씨가 떨어질 때, 하나하나의 볍씨는 생명의 근원에서 단절된 처절한 죽음을 맛본다. 그렇게 하여 곡식이 되고 먹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밖으로는 죽어있던 볍씨도 안으로는 생명의 불씨를 간직하고 있다. 따스한 햇살아래 대지가 씨를 품으면 싹을 틔우고 대지 위에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봄날 모판에 심기우면 볏모(秧苗, 벼의 모)가 되는 듯 말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그래서 더 큰 생명을 기약하러 더 많은 곡식이 된다. 만물의 이치가 그러하다.
   겨우내 죽었다가 따스한 봄날에 되살아나는 씨알 같은 게 또 하나 있다. 닭 알(달걀)이다. 닭 알은 씨알처럼 밖으로는 죽어있다. 그리하여 닭 알도 씨알처럼 기껏해야 사람과 동물에게 먹이가 될 뿐이다. 하지만 씨알처럼 닭 알도 안으로 살아있다. 대지가 씨알을 품음 같이 암탉이 제 알을 품으면, 알은 새 생명으로 부화(孵化)한다. 밖으로 죽어있던 생명의 씨앗이 안으로부터 껍질을 깨고 밖으로 살아 나오는 것이다. 내 어릴 적 기억에, 볕이 좋은 봄날 암탉이 양지바른 곳에 알을 품던 일이란 밖으로 죽었으나 안으로는 살아있는 자기의 알 속에 그 생명의 불을 당기는 부화의 몸짓이었던 것이다. 볕이 따스한 봄날 샛노란 병아리 떼가 줄지어 어미닭을 따르며 노래를 부르면, 그 작은 생명의 소리는 생명을 경외하는 심령마다 울림이 되어 천지를 흔든다. 그 모든 닭들과 병아리들은 우주 안에서 더 큰 생명의 고리로 순환하는 것이다. 창조의 섭리가 그러하다.
   이 따스한 봄날에 부활이란 무엇인가? 예수의 부활(復活)이란 닭 알의 부화(孵化)와도 같다. 인간들에게 밥이 되고자 세상을 향하여 죽었던 예수의 정신이, 육신(肉身)의 껍질을 벗고 세상과 나를 향해 밖으로 살아나온 생명의 몸짓이다. 베드로 같이 나약하고 비겁했던 자들에겐 예수의 그 음성을 일깨우는 신성한 아침의 닭울음소리이다. 안으로는 한없이 연약하여 작은 유혹과 시험에도 넘어지는 나에게 예수의 부활은 밖으로 한없는 용서와 화해를 향한 그 분의 숭고한 의지를 되살리는 거룩한 깨우침이다. 세상과 인류에게 예수의 부활이란, 그 어떤 불의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평화를 향한 신의 거룩한 뜻이 다시 소생하며 경쟁과 죽임의 더러운 문화 속에 인류와 세계를 향한 구원의 의지를 일깨우는 신성한 계명(鷄鳴)인 것이다.
   부활절 아침엔, 부활절 예배를 여러 번 드리고도 아직 내 안에 아니 부활한 예수의 정신을 그리워하자! 그것이 어렵거든, 부활절 아침엔 삶은 계란(鷄卵)을 먹어보자. 부화하기엔 지나치게 가열되어 미처 부화하지 못한 채 그대로 삶아진 닭 알을 먹어보는 것이다. 아니면, 가장 소중한 님을 위하여 정성스레 계란을 준비하자! 그렇게 나와 이웃에게 부화와 부활의 뜻을 깨우쳐보자. 그리고는, 죽었던 모든 생명이 소생하는 이 생명의 계절에, 태양의 죽음 가운데서도 태양의 부활을 앞서 알리는 저 희망의 신성한 닭울음소리처럼, 그렇게 예수 부활의 신비한 소리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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