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미국사의 평행 읽기 (2) |
보스톤코리아 2012-11-26, 16:45:48 |
여러가지 의미에서 종교 개혁 운동은 종교적인 사건의 수위를 넘어선다. 지난 칼럼에서 유럽의 16세기를 휩쓴 종교개혁 운동이 바로 그 16세기에 대규모로 확산될 수 있었던 까닭으로 르네상스 시기와 함께 발생한 인문학적 각성이라는 조건을 언급했었다.
그런데 개혁 마인드를 담지한 학자들의 성서 안팎의 인문학적 소양이 있다해도, 에라스무스가 이야기했듯 “모든 성서가 전 세계의 여러 말로 번역되고, 시골 농부와 베 짜는 아낙네 그리고 여행객이 성서 읽기로 지루함을 달래”는 상황에 까지 이어지려면, 성서는 모국어로 쉽게 읽을 수 있어야할 뿐만 아니라 싸게 구할 수 있어야 했다.종교 개혁 운동이 불붙기 약 한 세기 전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 활자가 바로 종교 개혁의 촉매가 되었다는데에 이견이 없는 까닭이다. 흥미롭게도 루터 본인이 무엇을 상상했건, 루터의 행보는 항상 상상 그 이상의 파장을 가져왔던 것 같다. 95개조 반박문 사건 이후 은신 중이던 루터는 독일어로 신약 성서를 번역했는데, 그 독일어 성서가 독일어 문법의 통일을 가져오게 되리라고는 루터 자신이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런데 대체 종교 개혁과 미국사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라는 지난 칼럼의 마지막 질문으로 되돌아가자. 이 질문을 듣는 많은 이들은 “필그림 파더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왔던…”라는 부분에서 시작을 할 것 같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들은 카톨릭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영국 국교회의 압박을 피해 온 이들이다. 또한 이런 대답은 그 시기 유럽으로부터 북미대륙에 건너와 정착하거나 교류했던 사람들을 영국계에 국한시키는 듯한 인상도 피할 수 없다. 유렵의 종교 개혁과 미국사와의 연관성 역시, 종교 개혁의 비종교적 영향을 통해 이해해볼 수 있다. 첫째, 종교 개혁은 봉건 사회의 지각 변동과 관련이 있다. 가령 루터 사건 후 몇년이 지난 1524년, 독일 슈바벵 지방의 민들이 영주의 착취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사실 중세의 교황권과 봉건 영주의 권한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중세 봉건제가 흔들려가는 상황에서 루터의 “기존 교회 권위에 대한 도전”이 농민들의 봉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의 아버지 루터는 종교적이긴 해도, 시골 농부와 베짜는 아낙네에 신경쓸 정도로 개혁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따라서 초반에는 어느정도 농들에게 온정적으로 보였던 루터가, 결국엔 농민들의 폭력성을 비성경적이라 비판하고 나섰다. 루터 종교 개혁의 열렬한 후원자 중에는 농민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악랄한 착취자의 전형인 프레데릭 선제후 같은 이들이 있었다. 결국 농민 봉기는 실패했고, 교회는 교황의 손에서 귀족의 손으로 넘어갔다. (루터는 농민 전쟁 당시 몇몇 귀족과 영주들의 편에 서 있는 자신의 입장을 커밍아웃하게 되었다.) 농민 전쟁 이후에도 독일에서는 신구교 간의 갈등, 엄밀히 말하면 카톨릭의 편에 서 있는 제후와 기존의 교회 권력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신교를 등에 업고 구교 편에 선 제후들과 대립관계에 선 제후들 간의 갈등 양상이 지속되었다. 결국 종교 갈등의 외피를 입고 있는 이들의 권력 다툼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봉합이 되었는데, 1618년에서 1648년 사이 30년 전쟁의 불씨는 남겨두고 있었다. 독일에서의 30년 전쟁 역시 표면 상으로는 신구교간의 갈등이라는 외피를 입고 있는듯 하지만, 정확히는 유럽 전역에서 힘겨루기를 하던 왕가들간의 국제적인 패권 다툼의 측면이 컸다. 이 전쟁은 에스파냐,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신성로마제국 등 유럽 각국이 연루된 국제전의 양상을 띄고 있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독일에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왕가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했다. 그 전쟁의 결과는 알려져있다시피 유럽 민족국가의 재편이었다. 이 과정에서 성장한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 유럽 열강은 17세기 말엽 몇가지 주요한 후속 (왕위계승) 전쟁을 치렀는데, 이때마다 미국에서도 전쟁이 벌어졌다. 미국사에 대한 또다른 영향은 신교가 루터주의에서 칼빈주의로, 그리고 칼빈주의가 새롭게 부상하는 상공업자 혹은 부르주아 세력에 대한 옹호로 이어지곤 했다는 점이 될 것이다. 이쯤해서 물어봐야 할것. “그들은” 왜 미국에 왔을까? 어떤이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왔을 것이다. 대개는 다양한 자본주의적 동기로 왔다. 청교도의 윤리도 사실은 자본주의 정신의 발현이었다. 그렇게 종교 개혁이라는 유럽에서의 종교적인 사건의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은, 비유럽적인 사건들과도 씨줄, 날줄로 엮이게 된다. 칼럼과 관련하여 궁금하신 점은 WisePrep 소피아선생님 (617-600-4777, [email protected])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email protected]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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