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다시 읽는 미국사 : 해리엇 터브먼 |
보스톤코리아 2010-09-27, 13:44:28 |
“제 기차는 한 번도 탈선한 적 없으며, 손님을 놓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남북 전쟁의 기선을 북부가 잡아가기 시작할 무렵인1862년 9월 22일,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 예비 선언Preliminary Emancipation Proclamation을 발표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노예제 폐지를 법제화한 수정헌법 13조 (1865)는 북부가 승리한 남북전쟁의 귀결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링컨 대통령을 노예 해방의 아버지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노예들은 링컨에 의해 노예제가 폐지되기 이전까지는 그들의 예속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였을까? 노예들의 탈출과 지하철도 (underground railroad) 노예제의 잔혹성을 고발한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 1852)에는 자유를 찾아 도망하는 노예들이 등장한다. 실제로 19세기 전반 남부의 많은 노예들이 북부의 자유주 혹은 캐나다로 도주했다. 1808년 노예 “수입”이 법적으로 금지가 된 상황에서, 노예 노동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남부의 대농장주들에게 도망 노예는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에, 도주하다 다시 잡혀온 노예들에게는 더욱 혹독하게 대했지만, 많은 노예들은 목숨을 걸고 다시 도망치곤 했다. 이들의 탈출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지하철도 (underground railroad)라는 조직이다. 지하철도는 자유 흑인과 퀘이커교도 등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북부 백인들 일부가 탈출한 노예들을 추격자로부터 따돌리고 안전한 북부의 자유주나 캐나다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던 비밀 네트워크다. 철도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이유는 이들이 주로 철도 용어를 은어로 주고 받았기 때문이다. 노예 부모 사이에서 노예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해리엇 터브먼 (Harriet Tubman, 1920~1913)은 29세에 지하철도의 도움으로 메릴랜드의 농장에서 펜실베니아로 탈출, 자유의 몸이 된 노예중 하나였다. 노예들의 모세, 해리엇 터브먼 탈출에 성공했으나 혼자만의 자유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녀는 지하철도의 “차장”이 되었다. 그녀는 노예들을 탈출 시키기 위해 수년간 여러 차례의 목숨을 건 여행을 감행했으며, 그 결과 가족과 친지를 포함한 300명의 노예들을 “단 한 명도 잃지 않고” 무사히 탈출시키는 데에 성공했다고 한다. 추격자가 따라 붙자 오히려 남쪽으로 가는 열차에 탑승하거나 추격자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트릭을 쓰는 등, 난관에 봉착할 때 마다 발휘했던 그녀 특유의 기지와 대담성 덕이다. 덕분에 그녀에게는 노예들의 모세라는 별명이 붙게 된다. 백인으로 과격한 노예해방론자였던 존 브라운은 그녀에게 “터브먼 장군”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녀의 삶은 불꽃같았다. 남북전쟁 당시에는 북측의 스파이로 활동하였고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로 살았다. 링컨 대통령에게 노예제 폐지와 관련된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다 보면 어쩐지 노예 자신들은 노예제 폐지에 있어 수동적인 “수혜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어 온 해리엇 터브먼 같은 이들의 존재는, 역사를 훨씬 균형잡힌 시각으로 그리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읽게 한다. 사실 링컨이 철저한 노예해방론자는 아니었다. 노예 해방 문제에 관한 그의 판단들은 철저한 연방주의자의 입장에서 부수적으로 따라온 성격이 크기 때문이다가. 가령 그는 “연방의 유지를 위해서 노예제가 필요하다면 노예제를 유지할 것이고, 연방의 유지를 위해 노예제를 없애야 한다면 없앨 것이다. 또한 둘 다 필요하다면 둘 다 유지할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1862년 노예 해방 예비 선언의 실제 내용은 남부 연합 압박용으로, 노예 해방의 당위성이 아니라 “1863년 1월까지 연방에 복귀하지 않는 반란 주(즉, 남부연합 소속 주)의 노예들을 (반란에 대한 일종의 응징으로서) 해방시키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뒤집어 말하면 북부연방에 복종 혹은 복귀하는 노예허용 주의 노예 제도는 그대로 용인하겠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U.S. History Key Words Confederation (남부연합): 남북 전쟁당시 남부 11개 주의 연합.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노예 허용 주이면서 남부의 주요 면화 생산지인 이른바 딥 코튼 사우스 (Deep Cotton South)에 해당하는 미시시피, 플로리다, 알라바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그리고 텍사스 등 7개 주가 먼저 분리독립을 선언하고, 이어 역시 노예 주인 아칸소•노스캐롤라이나•테네시•버지니아가 가담했다. 남부연합의 수도는 버지니아의 리치몬드였다. Fugitive Slave Laws (도망노예법): 자유 주로 도망한 노예를 원래 소유주에게로 돌려보내기 위해 1793년과 1850년에 제정한 법률. 특히 1850년의 도망노예법은 당시 노예주(Slave States)와 자유주 (Free States) 간의 첨예한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이루어진 몇가지 정치적 대타협의 일부로 제정되었는데, 1850년의 법은 도망 노예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에 대한 처벌을 포함하는 형태로 강화되었다.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해리엇 비쳐 스토 부인은 1850년의 도망노예법에 강력히 반발하여 톰아저씨의 오두막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법은 남북전쟁의 와중이던 1864년에 폐지되었다.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email protected] 이 컬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의견목록 [의견수 : 1] |
mudaepo69 | |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왜 일어났냐라고 한국학생에게 물으면 노예해방을 시키기 위해서, 미국 학생에서 물으면 남쪽이 연방에서 탈퇴하는 것을 막을려고. 같은 사실을 놓고 답이 다르죠. 사실 남북전쟁이 시작했을때도 노예는 해방되지 않습니다. 우수한 전쟁물자로 쉽게 전쟁을 이길 것이라는 북군쪽의 오판과 링컨을 무시하는 군부의 건방에 남쪽의 장교의 우세 및 목장에서 공급되는 기병의 파워에 전쟁이 아주 어렵게 됩니다. 전쟁이 갈수록 어렵게되자 링컨이 비장의 카드를 꺼냅니다. 노예해방입니다. 남쪽에서 흑인들이 빠져나와서 북군이 되는 전세역전의 신호탄입니다. 메사츄세츠에 흑인부대도 유명하죠 (영화 : 글로리). 아마 북군이 쉽게 이겼다면 노예는 해방되지 않고 다른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그중 하나는 제 3국으로 이주였습니다. 우리의 슬픈 현실이 생각납니다. 일본군을 물리치려고, 독립군에서, 미군특공대, 중국공산당, 소련공산당 까지 그 어디든 일본과 싸우는 곳이면 다 참전해서 목숨바쳐 싸웠지만 그들의 존재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해방과 함께 다 묻혀버리고 독립운동으로 가족과 많은 것을 잃은 후손들의 아픔만 남았습니다. 해방은 되었지만 그들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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