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스님,원효와 의상 대사
보스톤 전망대
보스톤코리아  2022-01-17, 11:17:35 
원효 대사 진영,조선 19세기,국립중앙박물관
원효 대사 진영,조선 19세기,국립중앙박물관
서기 645년에 인도로 유학을 떠났던 당나라 현장(602~664) 스님이 17년만인 674년에 당나라로 돌아오자 당나라 스님들은 물론이고 신라 스님들까지 새로운 불법을 배우려는 바람이 불었다. 이에 의상(625~702)은 사형 원효(617~686)에게 중국에 함께 유학할 것을 권유하게 되었다. 이때가 진성여왕 4년(650)이었는데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 순라꾼들에게 간첩으로 잡혀가 수십일만에 겨우 풀려 돌아왔다. 이 사실은 최치원의 의상 본전과 원효대사 행장에 실려 있는데 그때 원효의 나이는 34세였고 의상은 8살 어린 26세였다.

그후에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신라 문무왕이 즉위하던 661년에 원효, 의상 두사람은 다시 당나라 유학을 시도하게 된다. 원효대사가 44세, 의상대사가 36세때였다. 화성 당성은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에 있는 삼국시대 성곽으로 당항성이라고 불려왔다. 이 지역은 원래가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고구려 광개토대왕, 장수왕때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가 신라 진흥왕이 관산성 싸움에서 백제 성왕을 살해하고 이 지역을 점령하여 당항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당성이 위치하고 있는 남양지역이 지금은 화성이지만 신라 경덕왕때는 당은군으로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가 된 곳이다. 그래서 원효, 의상 두사람은 지난번 여행처럼 요동을 거치지 않고 당항성 뱃길로 해서 산동성 등주로 가는 일정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두사람이 길을 떠나 당항성에 이를 즈음에 극심한 폭우에 날이 저물어 토굴에 몸을 숨기고 극심한 비바람을 피하게 되었다. 정신없이 깊은 잠에 빠진 비몽사몽간에도 심한 갈증을 느껴 주변에 있는 물을 달게 마시고는 또다시 기분좋게 잠을 청하였다. 원효대사가 아침에 잠을 깨어 일어나보니 놀랍게도 간밤에 잠을 잔 곳은 토굴이 아니고 해골이 흩어져 있는 옛 무덤이었고 더 놀라운 사실은 어제 밤 달게 마셨던 시원한 물은 해골에 괴어 있던 썩은 물이었던 것을 알고는 연신 토악질을 계속 해대었다. 하늘에서는 궂은 비가 계속 내리고, 땅이 질척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토굴이 아닌 무덤속에서 하루를 더 묵게 되었다. 원효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전날 밤에는 토굴이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는데, 오늘 밤에는 귀신굴에서 잠을 자려하니 마음이 산란하고 께름칙하다. 토굴과 무덤은 각각 다른 것이지만 마음이 편하면 토굴과 무덤도 한가지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원효는 이순간에 커다란 깨달음을 얻게 된다. "모든 것이 생각하기 나름인데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 라고 말하며 의상과 가는 길을 달리하게 되었다.

무덤군이 발견되었던 백곡리 고분은 당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의상과 헤어져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마치 불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자유분방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술집과 기생집을 드나들고, 맨발로 걸어다니며, 쇠지팡이를 집고 다니는데 그 끝에 가위나 거울을 매달고 다녔다. 원효의 파격적인 교화활동은 당시 귀족적인 승단의 입장에서 보면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한번은 신라 국왕이 신라의 고승들을 모아 인왕회(仁王會)를 개최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원효의 행동이 미친 사람 같다는 상소를 올려 원효가 선발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원효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민중교화에 힘을 쏟아 수행자만의 담장을 헐어버리고 귀족불교대신 민중속에 살아 숨쉬는 불교를 전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원효는 어느날 아들 설총이 태어난 후에 속인의 옷을 걸치고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칭하며 화엄경의 구절을 노래로 만들어 무애라는 이름의 표주박을 가지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래와 춤으로 민중을 교화하였다.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가 행한 교화의 힘이 대단하였다.
그는 누구든지 지극한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열번만 부르면 서방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원효와 헤어지고나서 의상은 당나라 사신의 배를 빌려타고 당항포를 거쳐 산동성 등주에 도착한다. 양주(지금의 장수성)에서 신도의 집에 머물게 되는데 그집의 딸 선묘 낭자가 의상에게 반하게 되었는데 불문에 귀의한 의상에게 흔들림이 있을 수 없었다. 결국은 스승과 제자로 연을 맺을 것을 약속하게 되는데 두사람 사이의 인연은 속세를 넘어 후세와 신라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후에 의상대사는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서 화엄종 2대 조사인 지엄화상 문하에서 현수(법장)와 같이 화엄의 깊은 이치를 깨닫게 된다. 나중에 현수는 지엄의 뒤를 이어 화엄종의 3대 조사가 되고 의상은 신라 화엄종의 시조가 된다. 의상이 지엄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내막을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그날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었다.

"지엄은 전날 저녁 꿈에 큰나무 한그루가 해동(신라)에서 생겨나 가지와 잎이 우거지고 그늘이 생겨 중국에까지 와서 덮는 것을 보았다. 그 나무 위에 봉황새의 보금자리가 있어 올라가 보니 한개의 마니 보주가 있었는데 멀리까지 빛나는 것이었다." 꿈을 깬 후 놀랍기도 하고 이상해서 깨끗이 청소를 하고 기다렸더니 의상이 왔다. 지엄이 영접하고 나서 "내가 어제밤 꾼 꿈은 그대가 나에게 온다는 계시였구나." 그리하여 제자가 되는 것을 허락하니 이에 의상은 신라 화엄종의 큰 스님으로 탄생하게 된다. 의상은 8년동안의 정진 끝에 화엄경 60권을 요약, 편찬한 10권을 지어낸다. 나중에는 210 글자로 우리 중생들이 부처님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암송하는 "화엄일승 법계도"를 완성한다.

의상은 어느날 홀연히 귀국길에 오른다. 그 무렵 당나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감옥에 갇힌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으로부터 당고종의 신라 침공계획을 전해 듣고 의상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귀국을 서두른다.
선묘 낭자는 언젠가 의상이 학업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갈 때를 대비하여 의상, 법복 등 모든 집기를 장만하여 상자에 넣어두고 있었다. 의상이 총망중에 선묘의 집을 찾아 갔지만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하고 선묘가 서둘러 상자를 안고 바닷가로 나아갔지만 의상이 탄 배는 멀리 바다 가운데 있었다. 선묘는 "비나이다, 비나이다, 내 본래 진실한 마음으로 원하노니 이 상자가 저 배안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선묘는 의상이 탄배가 무사히 바다를 건널 수 있기를 기원하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 선묘의 기원대로 그녀는 바다용이 되어 의상의 뱃길을 지켰으며 의상을 위한 수호신이 되었다.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때 그 지역의 이교도들이 이를 반대하자 바다용이 된 선묘가 큰 바위돌이 되어 하늘을 떠다니며 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이 바위돌이 무량수전 뒤에 있는 큰 바위인데 조선시대때 쓰여진 택리지(擇里志)에 따르면 두돌 사이가 눌려 있지 않아 조금 빈틈이 있어 실을 넘기면 걸리지 않고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절 이름도 공중에 뜬 절이라고  해서 뜰 부(浮)에 돌 석(石)을 써서 부석사로 이름지었다. 바위에 쓰여진 글자의 돌석자 네모안에 점을 하나 찍어 놓은 것은 바위가 하늘로 떠오르지 않도록 고정한다는 의미로 찍었다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의상대사가 거처했던 조사당은 안동 봉정사 건물과 함께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무량수정 북서쪽 모서리에 선묘각이 따로 있고 선묘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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