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 깃든 우리 역사 12 : 경회루(慶會樓) |
보스톤코리아 2010-06-07, 13:13:08 |
그 후 임진왜란때 불에 타버린 것을 고종때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하였고 1999년에는 지붕의 일부를 수리하였다. 지금 만원짜리 지폐의 전면에는 세종대왕이 계시고 뒷면에 보이는 웅장하면서도 운치 있는 건물이 경회루다 태종이 하륜에게 명하여 경회루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임금이 올바른 정사를 펼치면 올바른 신하를 얻는 것을 경회라고 하면서 임금과 신하는 덕과 덕으로 만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회루에서는 왕이 주관하는 과거, 출동하는 군대를 위로하는 잔치, 기우제, 임금과 어진 신하들과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했는데, 제일 중요한 행사는 사신(칙사)접대였다. 조선 왕조 때 경회루에서 베푸는 사신(칙사)접대가 아주 융숭하였기 때문에 민간에서도 대단한 환대를 받는 것을 “칙사 대접”을 받았다고 하게 된 것이다. 경회루는 수정 전 바로 북쪽에 위치 하고 있다. 네모진 연못에 세워진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35칸이나 되는 큰 누각이다. 근정전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2층 누마루 집인데 아래층은 돌기둥을 세우고 위층은 나무로 누마루를 만들었다. 성종 때는 돌기둥에 용을 새겨 화려하게 치장을 하였는데 유구(오키나와)의 사신이 물속에 비치는 용의 모습을 보고 극찬을 하였다고 한다. 추녀 마루에는 잡상(雜像)이라는 짐승모양의 조각품들을 앉혀놓고 있는데 이것은 장식 효과와 함께 잡귀들이 건물에 범접 하는 것을 막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잡상은 아무 건물에나 설치하는 것이 아니고 지위와 격이 높은 건물에만 설치 한다. 품격이 높을수록 잡상의 수도 늘어나게 된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에는 7개, 도성의 정문인 남대문에는 9개가 있는데 경회루는 우리나라 건물 중 제일 많은 11개나 된다. 예전에는 경회루 연못 주위에 담장이 사방으로 둘려 있어서 경복궁에서 일하는 궁인들 조차 경회루를 볼 수 없었다.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에서 경회루에 갈 수 있었는데 그 외에는 동, 서, 남쪽에 세 개의 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세종 년간에 궐내각사 교서관에 정9품의 하급관리로 근무하던 구종직(丘從直)이라는 사람이 이전부터 경회루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들어오고 있었다. 마침 숙직을 하게 된 어느 날 밤에 평복 차림으로 경회루까지 숨어 들어가 산책을 하던 중에 마침 그곳에 거동하신 세종대왕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임금께서 어인 일로 이곳에 있느냐는 추궁에 구종직은 솔직하게 “신은 일찍이 경회루가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는데 밤에 근무를 하다가 감히 몰래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구종직이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춘추를 외우게 했더니 구종직이 거침없이 외워 버리는 것이었다. 다음날에 세종은 구종직을 정 5품 자리인 부 교리로 7계단이나 파격승진을 시키었다. 세종대왕은 관리를 뽑을 때 출신성분과 집안을 가리지 않고 실력을 중요시하는 분이었다. 천문관측 기구인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을 발명한 장영실은 원래가 동래부의 관비라는 노예신분이었지만 그의 자질을 파악한 세종대왕은 파격적인 발탁을 해서 정 3품 당상관까지 출세를 시키고 있었다. 사정전 근처에 천문관측기구를 보관해두는 흠경각까지 마련해 주고 있다. 경회루가 워낙 운치가 있고 조용하다 보니 임금들이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고 경회루에 오르는 일이 많았다.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자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고 단종을 계속 핍박하고 있었다. 울적한 단종이 경회루에 올라 탄식을 하다가 문득 아래를 보니 수양대군이 돌기둥에 지켜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단종은 울컥하는 마음에 성삼문에게 명하여 옥새를 가져다 수양대군에게 전하게 하였다. 왕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수양에게 옥새를 넘겨준 성삼문이 통곡을 하자 박팽년이 이것을 알고는 경회루 연못에 빠져 자살하려는 것을 성삼문이 말렸다고 한다. 연산군 때에 이르러서는 경회루가 난장판의 대명사가 된다. 성종의 대를 이은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고 무수한 사람을 죽이는 복수극을 벌이는데 이것이 바로 갑자사화다. 갑자년 이후부터는 연산군의 정사는 오로지 사람을 죽이고 벌주는 것과 노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조선 8도에 채홍사(採紅使)를 파견해 사대부의 첩과 양민의 아내와 딸, 창기들을 징발해서 그 중에서 700명의 운평(運平)을 뽑고, 그 중에서 300명을 뽑아 흥청(興淸)이라고 하였다. 연산군은 창덕궁에서 기거했는데, 노는 일만 있으면 경회루에서 운평, 흥청들과 어울려 놀곤 하였다. 경회루 연못 서쪽에 만수산이라는 가산을 쌓고 경회루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고 한다. 1505년 삼월 삼짇날, 자순 대비를 모시고 외명부를 초대해 잔치를 벌였다. 이 자리에 운평, 흥청 천여 명이 동원됐는데 이때 주지육림의 잔치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이 잔치를 일컬어 흥청망청 이라고 불렀는데 후일에도 재산을 마구 쓰면서 놀아대는 것을 “흥청거린다”라고 하게 되었다.
흥청망청의 흥청은 흥청을 데리고 놀았다고 하여 생긴 말이고 망청은 후렴으로 부쳐서 흥청망청 이 되었다. 1506년 연산군 12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이다. 우의정 강구손이 연산군의 처남인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에게 묻기를 “대감! 누이와 딸 중에 누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시오?” 하였다. 당시에 신수근의 딸은 진성대군의 부인 신씨로 후일에 중종의 단경왕후가 된다.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옹립하려는 모의를 하고 있던 박원종이 강구손을 통해 신수근의 마음을 떠본 것이다. 신수근은 매부(연산군)를 폐하고 사위(중종)를 왕으로 세우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반정을 반대한다는 뜻이다. 신수근은 반정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누이 역시 왕비 자리에서 폐비가 되었다. 그의 딸은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추대되자 자동적으로 왕비가 되지만 7日만에 반정 공신들의 압력으로 폐비가 되어 궁궐에서 쫓겨나는데 이분이 단경왕후다. 폐비 신씨는 인왕산 근처에 사는 할아버지 신승선의 집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신씨와 정분이 좋았던 중종은 폐비가 그리워지면 경회루에 올라가 인왕산 쪽을 바라다 보곤 했는데 신씨가 그 사실을 전해 듣고는 궁중에 있을 때 즐겨 입었던 분홍색 치마를 경회루에서 잘 보이도록 인왕산 높은 바위 위에 펼쳐 놓곤 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이 이 바위를 “치마 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비록 임금의 지위에 있었지만 힘이 없어서 사랑하는 부인조차도 지켜줄 힘이 없었던 것이다. 경기도 양주 장흥 면에 있는 온릉(溫陵)이 단경왕후의 능이다. 평생에 자식 하나 없이 중종의 따뜻한 손길만을 그리워하며 살았다고 해서 따뜻할 온(溫) 온릉이다. 앞으로 한국에서 개최될 G-20 정상회담 때 20개국 정상들의 만찬 장소로 경회루가 1순위 후보로 올라 있다고 한다. 격식을 따지는 딱딱한 분위기의 만찬보다는 경회루와 치마바위에 얽힌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곁들이면 의외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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