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이 들려주는 삶과 죽음, 그리고 영생의 이야기 9 |
보스톤코리아 2008-08-25, 21:06:07 |
사진: 김정선 19. Ramesses 2세와 Abu Shimbel 신전 아스완 High Dam의 건설로 Abu Shimbel이 물에 잠기게 되었을 때, 인류 문화 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대대적인 역사가 있었으며, 세계에서 온 3천명의 전문가가 5년에 걸쳐 4천만불의 예산으로, 신전을 2천조각으로 잘라 옮겨 200m위 새로운 터에 완벽하게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해체된 돌은 한개의 무게가 10-40톤에 달했다고 합니다. 신전을 복원하는데 가장 어려웠던 것은, 유적을 옮긴 후에도 원래처럼 일년에 2번 햇빛이 신전 가장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Abu Shimbel의 두 신전중에서 람세스 2세 신전은 매년 2월 22일(춘분)과 9월 22일(추분)에 입구로부터 61m 들어간 지성소까지 햇빛이 들어가게 건축되었다고 하는데, 복원후에도 똑같이 햇빛이 들어오도록 준비하는데만 1년 이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지성소에 있는 람세스 2세, 태양신 Ra, 떠오르는 태양의 신 라하라크티. 3조각상에는 20분간 얼굴을 밝게 비춰주는데 가장 왼쪽에 앉아있는 어둠의 신 Ptah에는 빛이 도달하지 않도록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Armon-Ra신, Ra-Horakhth신, Ptah신과 람세스 2세 자신을 위한 신전 정문에는 20m 높이로 앉아 있는 람세스 2세 자신의 4개의 상이 있습니다. 그 중 두번째 상체 부분이 지진으로 인해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좌석상 밑과 옆에는 부인, 자녀들의 조각이 조그맣게 있었습니다. 람세스 2세 신전은 33m 높이, 38m 폭과 56m의 길이라고 하는데 그 속에는 수많은 조각상, 신전기둥, 벽화조각, 벽화상형문자 등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아주 적은 부분만을 이해할 수 밖에 없었음이 아쉬웠습니다. 신전안은 사람들로 가득하였으며 밀려서 밀려서 구경해야 했고, 지성소를 보기 위하여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습니다. 상하 이집트의 여주인이며, 람세스 2세의 가장 총애를 받은 네페르타리 여왕을 위한 신전이 바로 옆의 돌산에 건축되었습니다. 28m 폭과 12m 높이로 된 신전 정문에서 4개의 람세스 2세 석상과 2개의 네페르타리 여왕 석상이 10m 높이로 서있었고, 발쪽에는 12명의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딸들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신전속에는 Hathor 여신 Pillars, 여러 가지의 네페르타리 신상, 람세스 2세가 아프리카 적을 죽이는 모습, Hathor 신과 Isis신에게 왕관을 받아 쓰는 모습 등 수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큰 바위산을 뚫고 만든 2개의 신전, 일년에 두번 지성소에 빛이 들어오는 신비한 구조물을 건축한 이집트인의 지식과 과학적 관찰, 3,200년동안 보존된 문화유산(오랫동안 모래속에 파묻혀 있었다고 합니다), 신비스러운 조각과 상형문자, 원시적이었을 건축기구를 이용한 거창한 건축, 아직도 남아있는 원래의 채색등등, 떠나오는 발걸음이 아쉬웠습니다. 카르낙 신전에서 받은 충격이, 이곳 Abu Shimbel에서 다시 한번 충격이 되어 온 몸과 마음에 큰 진동을 주었습니다. 20. 예수님 피난교회와 모세 기념교회 옛 카이로에 가장 오래된 교회는 아브사르가 교회인데(예수 피난교회), 이 교회의 부지가 바로 요셉과 마리아가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피난와서 아기 예수와 함께 숨어 살았다는 전설적인 곳이라 합니다. 아브사르가 교회의 제단 왼쪽에 아기 예수 피난 동굴이 있는데, 아래로 내려가면 길이 6m, 높이와 폭이 약 2.5m정도 되는 동굴이 나옵니다. 얼마전까지도 지하수로 잠겨 있었는데, 미국에서 수리비를 부담하여 물을 제거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 피난교회 가까이에는 모세 기념교회라는 유대인 공회당 건물이 있었고, 그 안에는 십계명판과 다른 유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옛 카이로 지역에는 이집트 기독교의 중심지인 곱트박물관이 있습니다. 콥틱크리스챤이라 부르며, 이집트 기독교인들은 323년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 이집트 기독교는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눈부신 신학적 발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641년 이슬람 군대의 이집트 정복후에 많은 박해와 제약이 있어 많은 기독교인들이 짧은 기간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집트 인구의 10%인 700만명이 힘든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21. 상형문자 (Hiergraphic symbols) 이집트는 3천년에 걸친 파라오 시대 이후에, BC 332년 알렉산더 대왕의 침범으로 종말을 고하고, 2천년동안 외국의 지배를 받게되며 상형문자가 사라지고 해독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국교가 되고 이집트 신전들이 폐쇄되고, 제사장은 신전을 떠났으며, 프톨레미아왕이 지시하여 만든 이집트지(誌)의 원본이 불타버렸습니다. 640년이후 아라비아 반도에서 온 이슬람군대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다른 종교와 언어 그리고 문화가 이집트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1798년경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원정을 왔을때, 수학자, 천문학자, 토목기사, 광산기사, 건축가, 화가, 인문학자등 175명의 전문가들로 하여금 이집트를 조사하여 이집트지(Description of l'Egypte)를 출간하여, 유럽에 사라진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에 대한 열풍이 불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리아 동쪽 53km,떨어진 작은 항구 로제타에서 그 유명한 로제타석을 발견하였습니다. 로제타석에는 BC 196년 사제들이 프톨레마이 5세(BC 210-180)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작성한 포고문이었다 합니다. 검은색 현무암의 상, 중, 하단에 각각 상형문자, 이집트 민용문자, 그리고 그리스 문자가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이 프랑스에 승리하고 로제타석을 차지하여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고 있습니다. 로제타 복사본을 이용하여 프랑스 샹폴리옹(1790-1832)이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고 1822년에 발표하였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샹폴리옹은 이집트를 방문하고 아스완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방방곡곡을 여행하며 신비에 쌓였던 상형문자를 해독하였다고 합니다. 이로써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상형문자는 마침내 그 얼굴을 세상에 드러냈습니다. 상형문자는 한 낱말에 들어있는 상징문자이자 표의문자이며, 동시에 표음문자이기 하다는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다음호에 마지막회가 연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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