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29) |
?????? 2024-05-20, 11:50:29 |
590년 무렵, 하종이 11세 풍월주 로 재임할 당시, 화랑들은 모계의 인통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지소태후(진흥왕의 모후, 574년 이후에 사망하였는데 화랑세기의 기록으로 봤을때 590년 무렵에는 이미 사망하였다) 를 종宗으로 하는 진골정통과 사도태후(진흥왕의 왕후) 를 종宗으로하는 대원신통, 그리고 부계든 모계든 가야의 혈통을 이어받은 가야파가 그들이었다. 게다가 낭도들의 우두머리인 풍월주의 위를 비롯한 부제, 대화랑 등의 자리를 놓고 계파간에 많은 다툼이 있었으니 낭정은 늘 화합보다는 분쟁이 더 많았다. 그래서 미실은 아들 하종의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사도태후에게 고하여 상선(전임 풍월주)인 이화랑(4세 풍월주 역임)과 세종(6세 풍월주 역임)에게 모든 낭도들을 모아 단합대회(낭도대회)을 열게 하고 크게 연회를 베풀어 주게 하였다. 그리고 화합의 상징으로 가야파인 김서현(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어머니가 아양공주로 대원신통파이지만, 아버지 김무력이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아들이기에 가야파로 분류되었다. 아양공주의 부모는 진흥왕과 사도왕후이다)을 전방화랑으로 삼았다. 후일 전방화랑은 전방대화랑으로 개명되었는데 부제 다음으로 화랑도의 3~5위 서열이었다. 한편 이 무렵 궁중에는 3태후가 있어서 과연 ‘여인천하’ 시대였다. 사도는 579년 차남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장손인 백정을 왕위에 올렸으니 그가 제26대 진평왕이다. 그리고 사도는 584년까지 섭정을 하였다. 사도는 진흥왕이 말년에 출가할 때 함께 불교에 귀의하여 묘법妙法이라는 법명을 받고 승려가 되어 614년 사망할 때까지 영흥사에 머물렀다. 그렇다고 속세를 완전히 등지고 출가를 한 것은 아니고 섭정을 그만 둔 뒤에도 미실을 법운法雲으로 삼아 조정의 업무에 관여하였기에 많은 정령政令들이 미실궁에서 나왔다(이들이 대원신통파이다). 두 번째는 진평왕의 모후 만호태후인데, 부모가 이화랑과 지소태후였기에 진골정통파로, 지소가 죽은 후 진골정통의 종宗을 이어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만호는 572년 남편 동륜태자와 사별한 후 입종과 금진이 낳은 아들 숙흘종과 사통하여 딸 만명을 낳았다. 이 만명이 김서현과 사랑에 빠져 아버지 숙흘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신한 몸으로 멀리 도망쳐서 살았다. 595년, 임신20개월 만에 남아를 출산하였으니, 그가 삼한의 대영웅 김유신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태후는 진지왕의 왕후였던 지도태후이다. 그녀는 진지왕이 폐위되어 출궁당했지만 어쩐 연유인지 함께 폐위되지 않았고, 사도와 만호사이를 오가면서 문노일파를 지원하였다. 9세 풍월주를 역임한 비보(법흥왕의 손자이며 비대전군의 아들이다)가 지도의 아들인 김용춘을 천거하여 당시 부제인 보리를 대신하려고 하였지만, 만호가 들어주지 않았다. 김용춘(진지왕의 아들이며 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이다)이 비록 부제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많은 낭도들이 그를 따랐다. 특히 가야파의 우두머리이며 전방화랑으로 있던 김서현이 용춘을 따르면서 가야파는 자연스럽게 김용춘에게로 들어갔다. 미실은 가야파 낭도들이 김용춘을 따르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김용춘의 어머니 지도가 흥도의 딸로, 흥도와 사도는 자매간으로 대원신통이기 때문이었다. 부언하건데, 김서현이 가야파이기는 하지만 서현의 어머니 아양공주가 사도의 딸이기에 그 또한 대원신통과 무관하지는 않았다. 즉 미실은 가야파를 대원신통파의 일원으로 보면서 흡족해 하였고, 보리(숙명공주의 아들로 진골정통파)와 용춘이 화합하기로 맹세하였기에, 진골과 대원의 논쟁이 완화되었다. 미실은 장남 하종을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정인情人 설화랑의 딸 미모美毛와 짝을 맺어주었다. 그들은 아들 모종毛宗과 딸 유모柔毛와 영모令毛을 두었다. 미실의 손녀 영모가 후일 김유신의 첫 번째 아내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환갑의 나이에 무열왕의 딸 지소智炤공주를 아내로 맞은 기록만 등장하는데, 지소의 장남으로 등장하는 삼광의 나이와 그가 지낸 벼슬 등 삼국사기에 기록된 행적을 볼때 삼광은 지소의 아들이 될 수 없다. 특히 화랑세기에는 삼국사기에 이름도 없이 숫자만 등장하는 딸 4명의 이름과 그들이 혼인한 남편들의 기록도 전한다. 또한 네 명의 딸들이 김유신의 장남 삼광과 돌림자가 같아 그들이 같은 어머니인 영모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뒤받침해주기도 한다. 화랑세기에 기록된 삼광의 누나들 이름은 진광, 신광, 작광, 영광이다. 장녀 진광은 김흠돌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는데, 그녀가 제31대 신문왕의 첫째 왕비이다. 불행하게도 681년 아버지가 일으킨 역모 ‘김흠돌의 난’ 으로 인하여 폐비되었다. 차녀 신광은 제30대 문무왕의 후궁이 되었다. 삼녀 작광은 보로전군寶路殿君에게 출가하였다. 보로전군의 부모는 진평왕과 보량(후궁)이다. 사녀 영광은 사촌 반굴과 결혼하여 김영윤을 낳았다. 광자 돌림인 딸 넷과 장남 삼광은 김유신의 첫 부인인 재매부인財買夫人(미실의 손녀 영모令毛) 의 소생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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