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24) |
보스톤코리아 2024-04-15, 11:28:49 |
572년 초여름 어느날, 미실이 동년 3월에 일어난 동륜태자의 ‘개 죽음’ 사건으로 인하여 출궁되어 궁밖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나마奈麻(11등급) 당두唐斗가 젖먹이 아이를 품에 안고 미실을 찾아 왔다. 사연인즉, 미생(미실의 동생)이 자신의 부인을 첩으로 삼고자 그의 저택으로 데려갔기에 어린 자식이 밤낮으로 어미를 찾는다고 호소하였다. 그러니 다만 색공만 하는 첩이 되게 해달라고 읍소하였다. 당두의 품에 안긴 아이가 너무나도 측은하게 보인 미실은 미생을 불러 책망하였다. “태자의 (죽음)사건 후 나 또한 조심하고 있는데, 어찌 다른 계집이 없어서 남의 처를 뺏느냐!” 며 당장 당두의 처를 돌려보내라고 호통을 쳤다. 미생은 늘 부모(미진부와 묘도)에게 효도하고 손윗누이(미실)를 섬기는데 감히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미실의 말에 순종하고 당두의 부인을 본가로 돌려보냈다. 미생은 어릴 때부터 진흥왕의 부름을 받아 궁으로 들어가 동륜태자와 금륜과 친구가 되어 함께 놀며 성장하였다. 그들은 나이가 들어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왕실의 여자들을 비롯하여 유화遊花들에게 이르기까지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어색漁色에 몰두하였다. 그들은 태자의 신분이기도 했지만, 미생은 용모가 수려하고 달변에다 춤까지 잘 추었으니, 남도南桃(유화들이 기거하는 지역/장소로 유추된다)로 갈 때마다 목숨을 바치겠다는 유화들이 천백을 넘었다(고 화랑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후일 미생은 처첩이 수 없이 많아 아들만 백 여명이 되어 그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왕경에는 당두의 처가 천하제일의 미색이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그 소문은 미생의 귀에도 들어갔고, 어색이라면 뒤지지 않았던 미생은 동륜태자를 안내하여 당두의 집으로 갔다. 미생의 ‘중매’로 동륜태자는 그날 당두의 아내를 품었다. 그후 곧(572년3월) 동륜태자는 부왕의 후궁인 보명궁을 홀로 월담하다가 개에게 물려서 죽었다. 갑자기 태자가 죽자 태자 자리는 차남 금륜이 이었지만, 어색의 자리는 미생의 차지가 되었다. 마침내 미생은 당두의 처를 불러 첩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에 당두는 미실을 찾아가 호소하였고, 미실의 호통으로 미생은 당두의 처를 돌려 보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미생을 잊지 못하고 혼자 스스로 도망하여 미생에게로 왔다. 미생은 당두의 처를 타일러 돌려 보냈다. 그리고 또 다시 당두가 미실을 찾아갈까 염려가 되어 조주祖主(삼국사기 권38, 직관 상에 집사성執事省은 본래 품주稟主 혹은 조주祖主라고 기록되어 있다)에 천거하여 발탁하였다. 이에 당두는 그 은혜에 진심으로 크게 감동하여 아내를 미생에게 바치려 했다. 그러자 미생은 미실의 명이 있었기에 그녀를 취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 무렵부터 미생의 인품이 조금씩이나마 향기를 내기 시작한 것같다. 한편 당두는 졸지에 요직에 발탁되었으니 그때부터 미생을 충심으로 섬기기 시작했다. 뿐만아니라 당두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미생이 색만 밝힌다고들 하지만, 자신이 겪어본 미생은 효도와 우애가 천하제일이라고 말하였다. 후일 미생이 조부調府에 들어가면서 당두도 함께 데리고 갔다. 당두는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여 재정을 안정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진평왕은 조부의 관리들을 모아 칭찬하며 하사주를 내렸다. 이때 미생은 모든 공을 당두에게로 돌리며 더욱 성숙된 인품의 일면을 보였다. 그러자 진평왕은 당두를 대나마(10등급)로 특진 시켰고, 조부의 우경右卿으로 임명하였다. 위의 서술은 572년 경부터 590년 경에 일어난 사건들을 간단히 압축한 것이다. 조부調府는 진평왕6년인 584년에 설치했는데, 진덕여왕5년인 651년에 영令 2인을 두었으며, 조부의 경卿은 2인이었는데, 문무왕 15년인 675년에 1인을 더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부의 경이 될 수 있는 관위는 병부대감 급이며, 병부대감은 OO에서 아찬까지로 나온다(아찬은 6등급). 병부대감이 될 수 있는 하한 관위의 기록이 탈락 되었는데, 집사성의 차관인 전대등의 관등이 나마에서 아찬까지인 것으로 보아, 병부대감의 하한 관위도 나마였다고 본다(이종욱,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 소나무 160쪽). 신라에서 진평왕 이전에는 나라 재정에 관한 업무를 품주가 맡았는데, 나라의 재정규묘가 커지면서 관련 관부와 관직을 체계화 하게 되었고, 584년에 조세 등 모든 재정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인 조부를 세웠다. 미생은 풍월주의 위를 마치고 조부의 영이 되면서 당두를 중요한 직책에 임명하여 나라 재정을 크게 안정시켰다. 한편 천하절색인 당두의 처는 이미 미생의 첩이 되어 있었고, 그간 미생의 아들 셋을 낳았다. 그래서600년 초 무렵, 왕성의 거리에는 이런 노래가 유행하였다고 한다. <마누라를 바쳐 부자가 되고 일곱 아들 모두가 말을 탄다네. 딸을 바쳐 가난해져 세 아들이 모두 베옷을 입었네.> 마누라를 바쳐 부자가 된 것은 당두를 일컬음이고, 딸을 바쳐 가난해진 것은 대남보를 말함이다. 대남보는 김용춘(13세 풍월주, 김춘추의 아버지)이 풍월주로 재임할때 그에게 딸과 재산을 바쳐 섬겼지만, 결국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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