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3) |
보스톤코리아 2023-11-06, 11:25:26 |
당대에 가장 으뜸이었던 미인들인 옥진玉珍과 벽화碧花와 오도吾道 등 세 여인의 가장 아름다운 정수를 모은데다 백화百花의 신묘함을 더해 태어났던 미실이었기에 그녀의 아름다움은 가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녀의 외할머니 옥진은 미실을 진흥왕의 후궁으로 들이기 위해 늘 곁에 두고 교태를 부리는 방법(미도媚道)과 가무를 전수하였다. 그러나 지소태후의 명으로 세종의 궁으로 들어가게 되자, 옥진은 낙심하여 말하기를, “내가 너를 가르친 것은 장차 너의 숙모의 잉첩이 되게 하려는 것이지 어찌 전군을 섬기라고 한 것이겠느냐?” 라고 실망하였다. 세종은 지소태후와 이사부 사이에서 태어난 전군殿君이다. 그들 사이에는 딸도 있었는데 그녀가 숙명공주이다. 미실이 처음 세종의 눈에 들어 입궁할 때는 혼인을 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 결국 부부의 연을 맺게된다. 미실은 남편 세종 외에도 많은 정인들이 있었다. 그녀의 연인들은 첫사랑인 5세 풍월주 사다함斯多含을 비롯하여 7세 풍월주 설원랑薛原郞, 10세 풍월주이자 동생인 미생美生, 제24대 진흥왕,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태자, 진흥왕의 차남이자 제25대 왕인 진지왕, 동륜태자의 장남인 제26대 진평왕 등이 그들이다. 먼저 미실의 첫 연인이었던 사다함과 그들의 관계를 따라가 본다. 사다함은 5세 풍월주를 역임한 용맹한 화랑으로 전장에서는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싸웠고, 친구들과는 교우이신을 넘어, 가장 친한 친구 무관랑이 죽을 때는 죽음마저 함께하였다. 사다함의 부모는 구리지仇利知와 금진낭주金珍娘主이다. 구리지의 특이한 출생과 이름에 관한 내력을 보면, 비지의 아들 비량比梁이 아름다운 후궁 벽화碧花457) 그리워하여, 늘 벽화가 가는 뒷간을 따라 갔다. 법흥왕은 비량공을 총애하였기에 그의 행동을 금하지 않았다. 마침내 비량과 벽화는 상통하였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를 구리지라 이름하였다. 구리지는 담력이 아버지 비량을 닮아 ‘천하무적’이었고, 준수한 외모로 무예武藝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숙위두상宿衛頭上으로 금진의 전殿을 지켰다. 구리지는 자신이 모시는 금진낭주를 사랑하여, 천주사에서 무려 5년간이나 발원기도를 하기도 하였다. 한편 금진은 위화랑의 딸인데, 언니 옥진과 함께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다. 옥진은 아름다운 미모에 아들 비대까지 낳아 법흥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지만, 금진은 미모도 옥진에 미치지 못했고 또한 자식 마저 낳지 못했으니(아마도 왕이 가까이 하지 않았기에…), 어느날 출궁을 당해 문상蚊上(아마도 문천의 상류쪽이나 북쪽에서 살았다고 추측된다. 문천은 현재의 남천이다)에서 홀로 살았다. 이에 구리지는 5년간이나 발원하였더니 ‘부처님이 주신 기회’ 라고 생각하고 금진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낭도들을 모아 금진을 원화로 받들겠다는 계책을 말했다. 나이도 어리고 명리名利 좋아했던 금진은 원화가 되기를 수락하였다. 그런데 날마다 찾아간 구리지에게는 다른 속셈이 있었기에, 원화라는 것은 의협의 인물로 낭도들과 함께 죽음으로써 의리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등…, 회유를 하여 마침내 그녀의 마음을 얻었다. 금진의 내심 또한 구리지의 늠름함에 마음을 빼앗겼기에 “5년 동안을 연을 맺기 위하여 발원하였다니, 너의 처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족하다” 고 하면서 원화되기를 포기하고 구리지와 함께 살았다. 옥진은 그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장남 토함兎含과 딸 새달塞達과 차남 사다함斯多含을 낳았다. ‘뒷간의 자식’, 구리지는 숙위를 하던 후궁 금진을 사모하여 5년간의 발원기도가 천주사의 부처님을 감동케하여 그녀와 함께 세 자녀를 낳았다. 하지만 구리지는 548년 장군 주령珠玲을 따라 출정하여 독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구리지가 독산성에서 전사할 당시 사다함은 갓난 아이었다. 그는 547년 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미실의 생몰년 기록도 정확하게 없지만 그녀의 일생 족적을 살펴보면 사다함보다 한두해 먼저 546년 경에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다함은 자라면서 아버지 구리지의 용맹성과 통솔력을 이어받아 15세 무렵에 화랑도를 이끄는 수장인 풍월주에 임명되었고, 또한 이사부가 대가야를 정벌할 때는 자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무렵 사다함과 미실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으로 연가를 주고 받으며 도탑게 정을 나누고 있었다. 457) 벽화는 21대 비처왕이 변방 날이군(현 경북 영주)으로 순시를 갔을때 그곳의 파로가 딸을 바쳤는데, 왕궁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여 잠못이루는 밤이 많았다. 그래서 경주에서 영주까지 변복을 하고 왕래를 하다가 결국 500년경 왕궁으로 데려와서 후궁으로 삼았다. 그런데 비처왕은 500년에 사망하였고, 지증왕이 늙은 나이에 즉위하였고, 왕의 아들 태자 원종이 벽화를 차지하였다. 후일 원종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법흥왕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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