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32세 풍월주風月主 신공信功(23) |
보스톤코리아 2023-06-01, 16:02:36 |
제38대 원성왕에게는 아들 삼형제가 있었다. 장남 혜충태자 김인겸은 791년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사망하였다. 인겸은 부인 성목과 아들 넷을 두었다. 그래서 인겸의 장남 김준옹이 798년 제39대 소성왕이 되었고, 소성왕은 2년 남짓 왕위에 있다가 800년 사망하였다. 차기는 그의 장남 김청명이 800년 13세의 나이에 즉위하니 그가 애장왕이다. 애장왕은 809년 왕의 숙부 김언승과 6촌 김제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동생 김체명과 함께 살해당했다. 결과적으로 원성왕의 적장손은 멸족되었다. 차기 왕은 반란을 일으킨 김언승(인겸의 차남)이 즉위하니 그가 제41대 헌덕왕이다. 헌덕왕이 826년 사망하자, 태자로 책봉(822년)되어 있던 왕의 동생인 김수종이 흥덕왕으로 즉위하였다. 김수종은 형 헌덕왕이 반란을 일으켜 조카 애장왕을 시해할 때 형을 도와 정권을 잡았고, 819년에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헌덕왕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지만 모두 당나라에 입조하였기에 수종이 태자가 되었으며, 결국 왕위에도 올랐다. 인겸의 차남 언승의 후손도 멸족된 것으로 추정된다. 흥덕왕 김수종은 인겸의 3남인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836년에 사망하였다. 그러자 빈 용상을 차지하기 위하여 흥덕왕의 사촌 김균정과 당질 김제륭(김균정의 조카로 김헌정의 아들이다)이 서로 대립하였다. 결과적으로 김제륭 일파가 김균정을 살해하였고 제륭이 용상을 차지하였다. 그가 제43대 희강왕이다. 희강왕은 원성왕의 삼남 김예영의 손자이다. 희강왕은 애장왕도 죽이고 숙부도 죽이면서 힘겹게 왕위를 차지하였지만 그 자리를 오래 보전하지 못했다. 838년 자신을 도와 김균정 세력을 제압하고 왕위에 오르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김명金明이 반란을 일으키자 궁중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차기는 김명이 즉위하니 그가 제44대 민애왕이다. 그는 김인겸의 사남 김충공의 아들이다. 민애왕이 838년 1월 왕위에 오르자 청해진에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하고 있던 김우징(김균정의 아들) 일파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 를 토벌하기 위하여 왕도王都로 왔다. 김우징 막하의 장군 김양이 839년1월19일 민애왕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김우징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제45대 신무왕이다. 신무왕은 희강왕 김제륭과 사촌간이다. 즉 원성왕의 삼남 김예영의 손자들이다. 참고로 원성왕의 차남 헌평태자 김의영은 비교적 조졸하였고 후사의 기록이 없다. 피의 보복으로 왕위를 차지하였지만 신무왕 김우징은 즉위 181일 만에 사망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재위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차기는 그의 아들 김경응이 제46대 문성왕이 되었고, 그는 숙부인 김의정을 양자로 삼아 차기 왕을 이으니 그가 제47대 헌안왕이다. 문성왕에게는 아들 김안이 있었다(김안의 어머니는 흔명부인 또는 미상이라는 설이 있다. 김안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의 고조부이다). 헌안왕은 아들이 없어 화랑의 국선 김응렴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계승케 하였으니 그가 제48대 경문왕이다. 경문왕의 두 아들과 딸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했으니 그들이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이다. 원성왕 손자들과 증손자들이 궁중에서 서로 죽고 죽이면서 피바람을 일으키는 가운데서 방계 후손들은 몇몇 살아 남았지만, 그간 이어져온 왕가의 남자는 헌강왕의 서자 김요 한 명만 남겨놓고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다. 당시 왕좌에는 진성여왕이 앉아 있었다. 886년에 즉위한 진성여왕은 처음에는 지방에 1년의 조세도 면제해주며 민심 수습에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가장 든든했던 후원자인 숙부이자 남편이었던 상대등 김위홍이 887년 갑자기 사망하자 정치 기강은 무너졌다. 게다가 당대의 대학자이자 관료였던 최치원의 평가와는 달리 음란하기 그지없었던 여왕은 색욕에 빠져 수 많은 미소년들을 처소로 불러들여 음사를 즐기는데만 주력하고 나랏일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후세 학자들은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888년 부터는 지방 주州, 군郡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에 세금을 독촉하니 이는 오히려 백성/농민반란의 기폭제가 되었다. 결국 민심은 더욱 흉흉해져 갔고 각처에서 민란과 도적의 무리들이 일어났다. 동시에 지방의 호족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조정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봉기한 무리들을 진압하려고 노력했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대표적으로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沙伐州(현재의 경상북도 상주)에서 일으킨 난도 진압하지 못하였다. 891년에는 북원北原(현재의 강원도 원주)에서 양길梁吉이 부하 궁예弓裔를 동쪽으로 보내서 명주溟州(현재의 강원도 강릉)을 차지하였다. 892년에는 견훤甄萱이 완산주(현재의 전라북도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자 인접 지역의 군현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 895년에는 궁예가 영주을 접수하고 한주와 철원까지 차지하자,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주변지역만 남게되었다. 심지어 896년에는 적고적赤袴賊444) 의 무리들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까지 진출해서 민가를 약탈하면서 왕성의 안위조차 위태하게 되었다. 444) 각처에서 일어난 농민반란군 가운데 붉은 바지를 입고 있던 무리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적고적이라 불렀다. 이들은 896년(진성여왕10년) 경주 서남방면까지 진격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www.korea.aks.ac.kr),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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