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왕과 고구려 사신, 임나(섭라)에 대해 상의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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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톤코리아 2022-12-08, 17:52:42 |
백제의 임나(섭라) 점령과 임나일본부설의 폐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고구려 21대 문자명왕(文咨明王)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내용은 왕 13년에 북위의 패자 효문제 세종이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접견하였는데 예실불이 말하기를 "일찌기 대국에 조공 바치는 것을 어기는 일이 없었는데 다만 북부여에서 생산되는 황금과 섭라(涉羅)에서 나오는 하옥(抲玉) 패류는 보내지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북부여는 말갈에게 쫓기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었으니 두가지 물품이 전달되지 못한 것은 백제와 말갈로 인해 생긴 일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북위의 세종이 말하기를 "고구려는 대대로 위왕실의 도움을 받아 여러 나라를 다스리고 오랑캐들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들어오는 보물이 줄어 들었으니 누구의 허물인가? 그대는 나의 뜻을 그대의 왕에게 전달하여 나쁜자를 없애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토산물 공납을 예전처럼 하게 하라." 라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당시 백제는 무령왕이라는 걸출한 중흥 군주가 나타나 국정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오히려 고구려가 몰리기 시작하였다. 신라도 예전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면 백제에 지원군을 보내곤 했지만 지증왕부터 진흥왕대에 이르러서는 백제에 지원군을 보내지 아니하였다. 예전에는 백제와 신라가 힘을 합쳐야 고구려를 막았는데 이제는 백제 혼자서도 고구려를 대적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521년 11월 무령왕 본기에 백제가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왕 13년에 3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고구려군을 대적하였는데 백제군의 숫자가 적은 것을 업신여기다가 대패하였고 같은 해에 백제는 임나의 하슬라,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 등의 여러 현을 합병하였다. 이로서 고구려의 위세가 전에 비해 상당히 줄어 "양서"에는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기록이 등장하게 된다. 519년에 고구려 문자명왕이 사망하였는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의 작막고(灼莫古) 장군과 일본의 사나노 아히다를 사절고 보냈는데 고구려 사신 안정(安定)이 일본에 와서 답례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고구려와 일본이 최초로 외교관을 교환한 사건이었다. 백제의 임나(섭라) 점령은 당시 국제 사회의 최대 화두였다. 그리고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한 쪽은 가야였다. 가야는 예로부터 임나가 자신들의 영역이었는데 백제가 이를 차지하자 크게 반발하여 고구려는 물론이고 신라, 왜, 북위, 양 등에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대응도 만만치 아니하였다. 백제는 임나에서 물러날 뜻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임나가 예로부터 백제의 땅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또 양나라와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임나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왜국의 경우에는 임나가 백제로 가는 길목에 있을 뿐만 아니라 왜국으로부터 선진문명을 받아들일 수 있고 임나에는 많은 왜인들이 살고 있어서 작은 소국들로 갈라져 있는 가야에 비해 백제의 손을 들어주게 되는 것이 필연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무령왕과 계체 천황이 아주 각별한 사이라는 것이었다. 첫째는 무령왕의 딸이 계체 천황의 황후라는 것과 무령왕과 그의 세째 아들 시아 왕자가 계체 천황의 집권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임나는 원래 가야에 속한 땅으로 가야, 백제, 왜 3국 교역의 중심지였다. 말하자면 일종의 자유무역도시였던 셈이다. 때문에 3국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던 곳이었다. 이곳은 가야에 속한 땅이었지만 백제와 왜는 자국상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군대도 파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섬라(임나)라고 부르는 이 지역은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이다. 기록에는 마치 임나 4현이 왜국의 땅이었지만 백제의 요구에 따라 이를 양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다. 백제가 임나 4현을 차지하고는 그 땅의 영유권에 대해 왜국 조정이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임나의 땅 주인은 백제나 일본이 아니고 가야였던 것이다. 가야는 6개 이상의 분국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였고 백제나 왜에 비해 국력이 약하였다. 그래서 가야는 백제, 왜와 양국 동맹을 맺고 임나지역을 자유무역도시로 내놓고 공공관리를 한 것이다. 덕분에 임나는 당시 국제무역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 처음부터 임나의 소유는 가야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결정은 힘있는 자가 차지하게 되어 백제의 땅이 되게 된다. 게이타이 천황의 4현(四縣) 반환 일본서기에는 26대 남대역(男大逆) 게이타이가 천황이 되었고 희대의 폭군이었던 무열 천황이 57세로 사망했는데 소생이 없어 계체가 천황이 되었고 백제 무령왕의 딸 수백향(手白香)이 황후가 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천황 6년에 혜적신 압산(狎山)을 백제 사신으로 보냈는데 백제(무령왕)가 임나 4현을 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요구하는 4현은 상다리(순창), 하다리(태인), 사타(구례), 모루(광양)이었다. 이에 혜적신이 이 4현은 백제와는 이웃이지만 일본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 백베에 줘서 나라를 합치게 되면 자연스럽게 후세에 닥칠 위험이 유예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당시 국무총리격인 대반 대련 금촌이 상세하게 이말을 듣고는 물부대련 녹녹하를 백제왕에게 칙을 전할 사신으로 정하였다. 물부대련이 난파의 객관을 출발하여 칙을 전하려고 하였는데 물부대련의 처는 "만약에 가야와 함께 땅을 나누게 되면 나중에 늘 비난이 이어질 건입니다"라고 하니 물부는 병이라 핑계를 대고서 다른 사신을 새로 임명하여 임나 4현을 백제에게 주었다. 백제, 왜국간의 내용을 늦게 알게 된 대형 황자는 이웃나라(백제)가 달란다고 그리 쉽게 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곧 객관에 사신을 보내어 이를 전하였는데 백제 사신이 답하기를 아버지 천황이 이미 말하였으니 일은 끝난 것이 아닌가? 아들인 황자가 천황의 칙언에 반대할 수 있겠는가? 몽둥이 큰쪽으로 때리는 것과 몽둥이 작은 쪽으로 때리는 것은 어느 쪽이 더 아픈가?라고 말하자 대형 황자는 그대로 돌아갔다. 대형 황자는 계체 천황 사후에 뒤를 계승한 안한(安閑) 천황이었다. 당시 왜국 조정에서는 백제의 임나 장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5-6세기경에 일본의 야마도 정권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지역에 통치기구인 임나일본부를 세워 일본이 지배력을 행사했다는 이미 폐기된 학설이다. 2010년 한일역사 공동연구위원회는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해,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음을 밝히고 있다. 다만 일본의 일부 역사 교과서에는 임나일본부설을 긍정하는 내용이 그대로 실려 공식적으로 폐기된 학설을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왜국이 임나를 5-6세기에 걸쳐 지배했다면 이 지역에 일본 문화의 유물 유적이 있어야 하는데 가야 지역의 고분자료에는 그런 증거가 일절 없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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