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28세 풍월주風月主 오기공吳起公(2) |
보스톤코리아 2022-11-28, 11:45:46 |
화랑세기에는 오기공에 대한 기록이 얼마되지 않는다.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아들 김대문이 작성한 것이다. 그 전문을 인용한다. [오기는 계사년 생이고 임술년에 화랑이 되었다. (흠돌은) 야명궁에 정성을 바치게 되자 선위仙位를 나의 아버지 오기공에게 전하고자, 흥원을 계책으로 꾀어 양보하게 하였다. 아버지는 낭정郎政이 무너졌기에 받지 않으려 했다. 진골정통파의 낭두들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고 피를 흘리며 따져 말하기를 “공이 나아가지 않으면 신臣 등이 장차 자멸할 것입니다” 했다. 자의慈儀황후 또한 나아갈 것을 권하여 마침내 (풍월주의 지위를) 받았다. 흠돌은 풍월주로 7년간 있고 나서 아버지가 비로소 풍월주의 위位에 나아갔는데 실제 28세 (풍월주)이다. 이 때 낭정이 이미 어지러워졌기에 급작스럽게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진공眞功, 흠돌欽突, 흥원興元 등이 모두 낭도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위에서 낭정을 전횡했다. 아버지는 바로 잡을 수 없는 것을 알고 3년간 재위하고 부제인 원선공元宣公에게 물려주었다.] 위 인용문이 28세 풍월주 오기공조에 기록된 전체 내용이다. 그는 633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20세 풍월주 김예원과 우야공주이다. 예원의 부모는 12세 풍월주 보리공과 만룡낭주이고, 보리의 부모는 4세 풍월주 이화랑과 숙명공주이다. 김오기의 어머니 우야공주의 부모는 제26대 진평왕과 난야궁주이고, 난야의 부모는 제24대 진흥왕과 미실이다. 7년간 풍월주에 있었던 흠돌은 부제인 흥원에게 그 위位를 넘겨 주지 않고 (김오기의 세력을 자신의 편에 가담시키려고?) 김오기에게로 넘겨 주었다. 흠돌이 흥원을 ‘계책으로 꾀어서’ 풍월주의 자리를 양보하라고 하였다는데, 기록이 없어서 그 내막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들은 그 때(662년) 부터 ‘흠돌의 난’(681년) 을 획책하고 있었을 개연성이 크다. 당시 흠돌은 35세였고, 진공은 40세였다. 흥원의 나이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흠돌보다 조금 연하로 추정된다. 흥원에 대한 기록으로 그의 궤적을 보면 늘 흠돌의 곁에서 한 급 아래의 벼슬을 하였다. 아울러 흥원은 늘 제통帝統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일생을 조정에 대한 원망으로 보냈다. 흥원은 호원의 아들인데, 호원의 부모는 진평왕과 태양공주이다. 태양공주는 진흥왕과 사도왕후의 딸로 조카인 진평왕을 섬겨 두 아들 태원과 호원을 낳았다. 하지만 그녀의 문란한 사생활과 두 아들이 진평왕을 닮지 않았다는 이유로 태원과 호원 형제는 성골에서 진골로 족강되었기에 제통을 계승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선덕과 진덕의 두 여왕을 거친면서 성골은 남자든 여자든 씨가 말랐고, 차기 왕위가 진골인 김춘추에게로 이어지자 흥원은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심히 괴로웠다. 그래서 늘 조정을 원망하며 입지가 좁아진 흠돌과 함께 ‘계책’을 꾸미면서 훗날을 도모하고 있었다. 한편 화랑도 내부에는 항시 파벌이 존재하였다. 540년 조직된 초기에는 크게 발현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계의 신분에 의하여 진골정통파, 대원신통파, 가야파로 나누어져서 서로 대립과 협력을 반복하면서, 풍월주의 파맥에 따라 대개 자파에 유리하게 ‘개혁’을 하면서 그 전통을 이어왔다. 그런데 김오기가 풍월주에 오른 662년 무렵에는 이미 화랑도들이 모두 사병화私兵化 되어 있었다. 26세 풍월주 진공을 따르는 낭도들, 27세 풍월주 흠돌을 따르는 낭도들과 27세 부제를 지낸 흥원을 따르는 낭도들을 중심으로 그 조직이 구성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낭정郎政이 바르지 않았기에 애초의 설립 목적인 “군신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하여, 그 행실을 보아 거용擧用하게 하였다.”(삼국사기) 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으며, 또한 “서로 도의를 닦고, 서로 가악歌樂으로 즐겁게 하며, 명산과 대천大川을 찾아 멀리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 중에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중의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삼국사기) 라는 것과도 판이하게 김오기가 풍월주에 올랐을 무렵에는 돌이킬 수 없는 형국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김오기는 그 직책을 맞지 않으려고 했지만, 위로는 처형인 자의왕후(문무왕의 비)의 권고와 또한 자신을 따르던 낭도들의 충성어린 행위에 힘을 얻어, 낭정을 개혁해보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 직을 맡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그래서 김오기는 그 위를 원선공에게 물려주고 나왔다. 김원선金元宣은 19세 풍월주 김흠순의 여섯째 아들로 29세 풍월주에 올랐다. 흠순은 김서현의 차남이자 김유신의 동생이다. 흠순은 문무왕이 김유신과 김인문(문무왕의 동생)과 함께 신라의 삼보三寶라 삼을만큼 유능한 장군이었지만, 형 유신에 가려져 후세에 전해지는 무게감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삼국사기 50권 중 열전이 10권인데, 그 중 3권이 김유신에 관한 기록이다. 반면 흠순에 관한 기록은 몇 줄 밖에 없다. 한편 화랑세기에는 흠순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많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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