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27세 풍월주風月主 흠돌欽突(2) |
보스톤코리아 2022-10-31, 11:11:20 |
660년 7월,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는 풍월주 흠돌을 비롯하여 많은 화랑도들도 참전하였다. 그들은 임전무퇴의 화랑정신으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지며 승전에 일조하였다.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의 계백을 맞아 승리할 수 있게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혀 주었던 대표적인 두 화랑이 있었으니 그들이 반굴과 관창이었다. 반굴은 19세 풍월주 김흠순金欽純(김유신의 동생)의 아들이고, 관창은 김품일金品日 장군의 아들이다. 이에 앞서 642년, 윤충 장군이 이끄는 백제의 군사들이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성을 함락하였다. 당시 대야성 성주는 고타소와 결혼한 김품석으로 김춘추의 사위였다.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사랑하는 딸과 사위와 외손주들을 모두 잃은 김춘추는 이때 반드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굳은 결의를 다졌다. 김춘추는 먼저 고구려에 가서 힘을 빌리려 했지만 실패하였고, 다시 당나라로 가서 당 태종의 신임을 얻어, 결국 나당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660년,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에게 13만의 군사를 주어 백제 정벌을 명령하였다. 동시에 태종무열왕은 김유신에게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로 진군하자 의자왕은 신하들과 대책회의를 했지만 의견이 서로 나누어져 싸우게 되었고, 그 동안 당나라 군사는 백강(백마강)으로, 신라 군사는 탄현炭峴을 넘어 진격했다. 이에 의자왕은 황급히 계백을 황산벌로 보내 신라군을 방어하게 하였다. 이에 계백 장군은 군사(삼국사기 원문에는 사사死士로, ‘목숨을 걸고 용감히 나선 전사’ 라는 뜻이다) 5천을 뽑아 나당연합군을 막고자 출전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 나라의 사람으로서 당과 신라의 대규모 병력을 맞게 되었으니, 국가의 존망存亡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잡혀 노비奴婢가 될까 염려 된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어서 흔쾌한 편이 나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마침내 처자식을 모두 죽였다.406)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지난 날 구천句踐은 5천명으로 오나라 70만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지금 오늘 마땅히 각자 힘써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며 군사들을 독려했고, 네 번의 소전투에서 신라군을 막아내었다. 그러자 수세에 몰린 신라는 김흠순의 아들 반굴407) 을 전장에 투입하여 1인 돌격술을 구사하였다. 그는 백제군 여러명을 죽이고 자신도 전사했다. 반굴의 죽음으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을 더욱 독려하기 위하여, 좌장군 김품일은 16세인 자신의 아들 관창에게 명하여 반굴을 따르게 하였다. 화랑 관창은 단기필마로 적진으로 달려 갔다. 힘껏 싸우다 사로 잡혔다. 계백 장군은 그의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에 감탄하여 살려서 보내주었다. 신라군 진영으로 돌아온 관창은 아버지 품일에게 다시 하직인사를 적진으로 돌격하였다. 결국 계백은 백제군이 계속 죽는 것을 볼 수가 없었고, 관창의 목을 베었다. 관창의 죽음으로 인하여 신라군은 백제군보다 더 죽을 각오로 싸웠고, 결국 백제군은 전멸하였으며 계백도 전사하였다(좌평 충상과 달솔 상영 등 20여명은 신라에 항복하였다).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군은 기벌포에서 승리한 당나라군과 합류하였다. 연합군은 곧 사비성을 함락시켰고, 660년7월18일, 웅진성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반격하려던 의자왕은 웅진성 성주 예식진의 배신으로 나당연합군에게 넘겨졌다. 태종무열왕은 장렬히 전사한 화랑 관창을 급찬(9등급)에 추증하였고 비단과 곡식을 내려주어 장례를 잘 치루게 하였다. 406) 삼국사기 권47, 열전7, 계백열전 407) 아버지 김흠순으로부터 “신하가 되어서 충성이 제일이요,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가 제일이다.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가 모두 이루어진다” 라는 말을 듣고 충효로써 싸움에 임할 것을 맹세하고 홀로 적진에 뛰어 들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도 화랑 관창과 같은 급찬(9등급)으로 추증되었다. 반굴의 아버지 김흠순은 19세 풍월주를 역임하였다. 흠순은 김유신의 동생으로 김유신에 버금가는 신라의 대장군이었다. 반굴의 어머니는 보단낭주菩丹娘主인데, 12세 풍월주 김보리의 서녀이다(보리의 적자 예원은 20세 풍월주를 지냈고, 화랑세기를 편찬한 김대문의 조부이다. 보리의 적녀 보룡은 문무왕의 왕후인 자의왕후의 어머니이다. 또한 보리는 서자로 보태와 보호를 두었고, 서녀는 보단과 이단이 있었다. 김흠순이 18세에 전방화랑이 되어 전임 풍월주인 상선 김보리에게 인사를 갔다가 보단의 아름다움에 빠져 청혼을 하였고, 아내로 맞게 되었다. 그리고 흠순이 술을 끊고 아내를 헌신적으로 사랑하자, 보리는 이단도 그와 혼인시켰다). 반굴은 김흠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김유신의 딸인 사촌 영광令光을 아내로 맞아 아들 영윤令胤을 낳았다. 영윤은 684년 고구려의 잔적들이 보덕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사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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