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27세 풍월주風月主 흠돌欽突(1) |
보스톤코리아 2022-10-24, 11:16:22 |
26세 풍월주 진공眞功은 5년간 그 직위에 있다가 656년 김흠돌에게 물려주었다. 흠돌은 627년에 태었났는데 그의 부모는 김달복金達福과 정희이다. 달복의 선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다른 아들 흠운이 태종무열왕의 사위로, 삼국사기 ‘김흠운전’ 에 “김흠운은 나물왕의 8세손으로 아버지는 달복 잡찬이다” 라는 기록으로 보아, 달복이 내물왕의 7세손이며 잡찬(3등급)의 벼슬을 지낸 진골 귀족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김흠운은 김춘추와 후궁(보희, 김유신의 동생)의 딸 요석공주를 아내로 맞아 딸(신문왕의 왕비인 신목왕후)을 낳고, 655년 조천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요석공주는 후일 원효대사와 혼인하여 설총을 낳았다). 정희는 김서현의 딸로 유신의 동생이니 문명왕후 문희의 동생이기도 하다. 그래서 흠돌은 이모인 왕후의 후견으로 ‘마음이 험악하고 간사한 꾀가 많아 사람들이 모두 꺼렸음’ 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하여 화랑도의 수장인 풍월주가 되었고, 심지어 자기가 좋아하고 따르는 왕자를 차기 군주로 세우려고도 하였다. 후일 681년에는, 왕(신문왕)의 장인이면서도 반란을 일으켜, 실패로 돌아가자 처형당했으며, 왕비였던 딸은 폐비가 되었고, 혈족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역사는 이 사건을 ‘흠돌의 난’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405) 역모로 죽었기 때문인지 화랑세기에도 그에 관한 기록은 미량이며 업적이나 칭찬의 내용은 전혀 없다(당시 흠돌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할때 호성장군이 바로 화랑세기의 집필에 필요한 자료를 취합한 김오기였다. 김오기는 김대문의 아버지이다). 김흠돌은 627년 태어나서 656년에 풍월주가 되었다. 그가 풍월주로 재임할 당시에는 백제와 고구려에 대항한 수 많은 전쟁이 있었다. 660년, 백제는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678년간 이어온 왕조가 막을 내렸다.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많은 피를 흘렸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황산벌 전투에서도 백제군사들에게 몇 차례나 밀리면서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 전투에는 풍월주 김흠돌이 이끌던 많은 화랑도들도 참전하였다. 그들은 ‘임전무퇴臨戰無退’ 의 화랑도 정신을 받들며 고귀한 목숨을 기꺼이 바쳤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김품일金品日 장군의 아들 화랑 관창官昌과 김흠순金欽純 장군의 아들 화랑 반굴盤屈이었다. 405) 681년 7월 제30대 문무왕 김법민이 죽었다. 이어 즉위한 신문왕 김정명은 즉위 1개월 뒤인 8월, 삼국통일전쟁 때 많은 공을 세운 장군 김군관(화랑도 출신으로 23세 풍월주을 역임하였다) 을 상대등에서 병부령으로 강등시켰다(겸직하던 자리를 상대등에서 해임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고구려 멸망은 물론, 나당전쟁에서도 종군한 백전노장을 강등시킨 것은, 수 많은 전쟁과 그 승리의 결과로 삼국이 통일된 후, 거대해진 무관 진골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견해가 크다). 그리고 며칠 후 8월8일, 신문왕의 장인인 잡찬(3등급) 김흠돌이 주축이 되어 파진찬(4등급) 김흥원, 대아찬(5등급) 진공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 모두 화랑도 출신으로, 흠돌과 진공은 풍월주를 지냈고, 흥원은 진평왕의 손자이다. 특히 흠돌은 문명태후(김춘추의 비)의 조카이자 신문왕의 장인으로 위세가 상당했다. 그러나 신문왕은 즉위 후 막강한 권력을 가진 흠돌을 견제하여 전제왕권을 확립하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김군관의 강등으로 김흠돌 세력이 도모했던 역모가 들어나자 그들은 서둘러 반란을 일으켰고, 이미 예상한 신문왕은 준비된 진압군으로 반군을 제압하였다. 산속으로 도망쳐 숨은 잔당들까지 샅샅히 추적해 3~4일 만에 모두 주살하였다. 그리고 16일에는 교서를 내렸다. 그 교서의 일부를 보면 “… 과인이 왜소한 몸과 볼품없는 덕으로 숭고한 기틀을 받아 지키는라 먹을 것도 잊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들며 여러 중신들과 함께 나라를 편안케 하려 하였다. 그런데 어찌 상복도 벗지 않은 때에 경성에서 난이 일어나리라 생각했겠는가? 적괴의 우두머리 김흠돌, 김흥원, 진공 등은 벼슬이 자신의 재주로 오른 것이 아니고, 관직은 실로 성은聖恩으로 오른 것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삼가 부귀를 보전하지 못하였도다…” 주모자들은 모두 참형을 당했고, 혈족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김흠돌의 딸인 왕비도 폐비되었다. 그후 곧 김흠운(공교롭게도 그는 김흠돌의 형 또는 아우이다) 의 딸을 계비로 맞았다. 그가 신목왕후이며 제32대 효소왕과 제33대 성덕왕의 어머니이다. 김군관 역시 모반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참수당했고, 혈족은 멸하지 않았지만 김군관의 아들 한 명을 자결시켰다. 그럼 김흠돌은 왜 모반하였는가? 견해와 해석은 여러가지이다. 친밀하게 지내던 김군관의 강등과 후손을 얻지 못하고 있던 왕비를 보고 위기 의식을 느껴 준비도 제대로 안된 상황에서 일으켰다는 설과 통일전쟁의 승리로 거대해진 진골귀족 세력을 누르기 위한 ‘친위 구데타’ 설 등 분분하다. 결과적으로 신문왕의 즉위와 함께 일어난 이 ‘유혈 사태’는 신문왕에게는 무소불위의 강력한 왕권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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