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24세 풍월주風月主 천광공天光公(7) |
보스톤코리아 2022-05-09, 11:40:35 |
가야파의 우두머리인 찰인察忍이 나이가 60이 지나서도 대노두로 있으면서 화랑의 낭정을 좌지우지하였다. 또한 그의 아들 찰두와 찰석도 도두가 되어 처첩과 자녀가 백을 헤아리며, 출입을 할 때의 행차는 마치 상선들과 같았다. 또한 찰인의 사위 당보는 대도두로 있었으며, 게다가 찰인의 막내 아들 찰의는 김양도의 폐아嬖兒로 있었으니, 찰인 일파의 위세는 풍월주에 버금갔다. 이를 못마땅히 여긴 풍월주 천광공은 화랑의 일대 개혁을 단행하였다. 대노두 찰인을 파면시키고, 진골정통파의 만덕萬德을 대도두로 삼고, 당보를 대노두로 삼았다. 당보는 찰인의 사위였지만 당두의 아들로 대원신통파이다. 그리고 낭두들의 직급에 나이 제한을 두는 규칙을 새로이 정했다. 화랑세기의 기록을 보면, [당보는 곧 당두의 아들로 대원신통파였다. 그러므로 가야파가 크게 놀라 다투어 상선에게 가서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천광공은 우뚝 서서 들어주지 않고 규칙을 새로이 정했다. 대노두大老頭는 60살까지로 한정하고, 대도두大都頭는 55살까지로 한정하고, 도두都頭는 50살까지로 한정하고, 대두大頭와 상두上頭는 45살까지로 한정하고, 낭두郎頭와 대낭두大郎頭는 40살까지로 한정했다. 별장은 각기 그 지위에 따르게 했다. 인원은 3파를 고루 써서 사리사욕에 치우치지 않도록 했고, 망두望頭는 재주와 그릇의 바탕에 의거하고 마복자를 논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신진의 문을 크게 열었다. 인심이 크게 흡족했다. 그 때 국사가 점점 어려워졌다. 천광공과 낭두들이 낭도를 거느리고 친히 활 쏘고 말달리는 것을 익혔는데, 모인 자들을 선발하여 병부에 보충했다. 천광공이 5년간 풍월주의 지위에 있는 사이에 낭정郎政은 무사武事로 많이 돌아갔다. 선덕제의 병이 몹시 위독해지자,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모반을 했다. 유신공이 신주新主를 도와 전쟁을 독려했다. 그 때 서울京師의 군대가 적어 천광공이 화랑도를 모두 동원하여 먼저 그 진으로 돌격했다. 비담이 패하여 달아나고 난이 평정되었다. 천광공은 그 공功으로 발탁되어 호성장군護城將軍이 되었다.] 풍월주 김천광의 아버지 수품이 636년에 상대등에 올랐다. 수품의 퇴임 연도가 기록에 없어서 언제까지 그 위位에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즉 비담이 645년 상대등에 오르기 전에 또 다른 인물이 그 위位에 있었는지, 아니면 수품이 645년 까지 그 위位에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비담은 제27대 선덕여왕 재위말기인 645년에 상대등에 올랐다. 그리고 곧 왕의 지병은 악화되어 갔다. 왕위를 이을 자녀가 없었던 선덕여왕은 차기 왕위를 사촌인 승만勝曼에게로 물려 주기로 했다. 이에 불만을 품었던 상대등 비담이 647년 1월, 염종의 군사와 함께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 라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즉 왕위가 또 다시 여자인 승만(진덕여왕)에게로 이어질 것이니, 이에 대항하여 왕위 찬탈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자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왕명을 받은 김유신은 월성을 먼저 장악하였고, 한편 비담은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다. 화랑세기의 기록을 보면 선덕여왕이 병이 들면서 나라가 어지러위지고 있었으며, 이에 화랑도들도 군사적인 임무가 커져서 훈련을 열심히 하여 병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상한 바와 같이 647년 연초에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있던 반란군 토벌에 화랑도들이 선봉에 서서 난을 진압하였고, 화랑도의 수장인 풍월주 김천광은 그 공으로 호성장군에 봉해졌다. ‘비담과 염종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숨은 공로자들인 풍월주 김천광과 화랑도들의 역할을 화랑세기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에는 화랑도들의 언급은 별도로 없이 김유신의 군사가 반란군을 진압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비담은 명활산성에, 김유신의 군사는 월성에 진을 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 이에 비담이 부하들에게 “이는 틀림없이 여주女主(여왕을 비하하는 말)가 패할 징조이다” 라고 말하자, 반란군들의 사기는 고조되었다. 이에 김유신은 왕을 안심 시킨 후 다음 날 밤 허수아비에 불을 붙인 후 연을 띄워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는 “어제 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 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관군들을 기세가 올라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비담의 난은 10여일만에 진압되었고, 비담과 염종을 포함한 일족 30여명은 정월17일에 처형되었다. 그 반란 와중인 정월 8일 선덕여왕은 지병으로 죽었고, 승만이 제28대 진덕여왕으로 즉위하였다. 반란의 역신으로 처형되어서 그런지, 비담과 염종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귀족이란 신분과 반란 당시의 관직과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 외엔 아무 것도 전하지 않는다. 379) 반란 당시 비담은 상대등, 염종은 대아찬(5등급)의 벼슬에 있었다. 둘 다 647년 1월17일에 처형되었다. 부모와 출생의 기록도 없다. 비담의 아들 김비후金毘珝와 염종의 아들 염석廉析의 기록이 전하는데, 그들 모두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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