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23세 풍월주風月主 군관공軍官公(6) |
보스톤코리아 2022-02-28, 11:44:17 |
화랑세기花郞世紀, 23세 풍월주風月主 군관공軍官公(6) – 김군관은 640년에 풍월주의 위에 올라 643년 까지 약 4년간 화랑도를 이끌었다. 당시는 제 27대 선덕여왕이 재위(632~647년)하고 있었는데, 김양도와 함께 선덕여왕을 입시入侍하였기에 작위를 뛰어 넘어 받았다. 소위 왕의 총애로 출세가도를 달였기에 많은 사람들로 부터 시기를 받으면서, 부당하다는 비판을 감수해야만 했다. 또한 김군관은 재위 내내 독자적으로 화랑도를 지휘하지 못하고 늘 김양도의 뜻을 따랐다. 하지만 김양도는 마냥 어색에 빠져 지내는 시간이 많았기에, 그의 부인 보량이 낭정을 전횡했다. 이에 풍월주 김군관과 그의 부인 천운은 비록 화주의 자리에 있었지만 보량의 뜻을 기꺼이 따랐다. 그런데 문제는 보량이 때때로 사사로운 정에 얽매어 지나치게 공평하지 못했기에 많은 낭두들의 불평이 분출하였다. 하지만 김군관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부제 천광이 낭두들의 불평을 보량에게 전언하려 하면 이번에는 화주인 천운이 가로 막았다. 결국 무기력에 허탈감만 맛본 천광도 그 이후로는 아무런 진언도 하지 않고 다만 차기 풍월주에 오를 날만을 기다렸다. 낭정의 균형추가 보량에게로 쏠리자 보량의 집에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풍월주인 김군관의 집은 적막하기만 하였다. 게다가 김군관은 여느 풍월주들과 같이 축첩을 하거나 어색을 전혀 하지않고 오로지 부인 천운만 바라보고 살았기에, 그들은 화랑도들에게 대중적이기 보다는 고매한 한 쌍의 부부로 비추진 것같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천운天雲의 이름을 빗대어 “천운은 높고높아 인간의 비가 되기 어렵다, 天雲高高 難作人間雨천운고고 난작인간우” 라고 이르렀다. 이어지는 화랑세기에 보면, [군관공은 풍월주로 4년간 재위하며 오로지 명을 받드는 것을 주로 하여 한결같이 양도공의 구정舊政을 따랐으며 낭두를 쫓아내고 승진시킬 때 조그만 변화도 없이 부드럽게 지나갔다. 그런데 양도공의 낭정은 모두 보량에게서 나왔다. 천운이 비록 화주花主의 자리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빈 그릇을 끌어안고 있는 것과 같았다. 불평하는 낭도들이 노래를 지어 비방하기를 “보량의 문중에는 사람이 구름 같고 천운의 집 위에는 흰 구름 지나간다” (寶良門中人如雲 天雲堂上白雲過 보량문중인여운 천운당상백운과) 라고 했다. 천광이 매번 보량이 사사로움을 행하고 낭두들이 불평하는 실상을 말하면, 곧 천운이 꾸짓어 말하기를 “네가 감히 은혜로운 주군의 흠을 말하는가?” 했다. 천광이 말하기를 “그 은혜를 갚고자 하기 때문에 흠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했다. 군관공이 천천히 위로하여 말하기를 “네 누나의 견해와 나의 견해가 같다. 머지않아 네가 풍월주가 되면 네 마음대로 하겠지만 지금은 우리 부부의 흠을 보지 않는 것이 좋다” 했다. 이로써 천광은 감히 한 가지 일도 말하지 않았다.] 김천광의 생몰년은 미상인데, 14살에 김흠순이 19세 풍월주로 재임할 당시 화랑이 되었다는 기록이 화랑세기에 전한다. 김흠순이 풍월주로 재임한 시기는 629~632년이다. 이로 미루어 천광은 615년에서 618년 사이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642년(24~27세 사이)에 풍월주로 취임하여 647년까지 화랑도를 이끌었다. 그는 차기 풍월주의 위를 처남인 김춘장에게 물려 주었는데 그 시기는 비교적 정확하게 고증해 볼 수 있다. 647년 신라에는 큰 변고가 있었다. 제27대 선덕여왕이 죽고 사촌 김승만金勝曼이 진덕여왕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비담과 염종의 난’371) 이 있었다. 비담의 난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선덕여왕조와 김유신열전에 등장한다. 그리고 화랑세기(24세 천광공조) 에도 등장하는데, 물론 김유신의 총사령관으로 난을 진압했지만, 화랑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경사京師(월성)의 군대가 적어 화랑의 수장인 김천광이 모든 화랑도를 이끌고 선봉부대로 비담과 염종의 군대를 공격했다. 그리고 난은 진압되었고, 천광은 그 공으로 호성장군護城將軍이 되었다. 371) 645년 상대등에 오른 비담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한편 선덕여왕은 병환이 깊어져 사촌동생인 승만을 차기 왕으로 정해 놓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비담이 염종의 군사와 함께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 라는 명분을 내걸고 647년1월에 일으킨 반란이 ‘비담,염종의 난’ 이다. 김유신과 김춘추를 중심으로 한 군사와 풍월주 김천광이 이끄는 화랑도들에 의해 난은 진압되었고, 비담은 1월17일 처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그의 9족과 가담한 지휘관 30여명도 함께 숙청되었다. 선덕여왕은 그 난리 중인 1월8일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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