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대통령 별세, 북방외교와 탈냉전 외교 새지평 |
공산권과 첫 외교관계, 남북관계 물꼬…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도 토지공개념 적용·1기 신도시·200만호 공급…부동산 시장 안정 |
보스톤코리아 2021-10-26, 11:31:50 |
(서울=연합뉴스) 고동욱 차지연 김다혜 김경윤 기자 = 26일 별세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은 세계적인 탈냉전 시대와 겹친 재임 기간에 외교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부 수립 이래 처음으로 공산권 국가와 정식 외교관계를 맺었다. 북한에 대한 인식 전환과 함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첫 남북 고위급 회담 성사, 남북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 같은 남북관계 개선의 디딤돌도 쌓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2월 취임사에서 "이념과 체제가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은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 공동의 번영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 해 7월에는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7·7선언)을 발표하고, 이후 공산권 국가와 수교를 추진해나갔다. 가장 먼저 수교한 공산국가는 헝가리였다. 당시만 해도 공산국가와 전혀 교류가 없었지만, 한국은 헝가리에 6억5천만 달러의 경협자금을 제공키로 하고 약속한 은행 차관의 절반인 1억2천500만 달러를 건네며 1989년 2월 동구권 국가로서 첫 수교를 맺었다. 같은 해 11월 폴란드에 이어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는 물론 1991년 8월 알바니아까지 동유럽 7개국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1990년 6월 소련과의 정상회담은 '태백산'이라는 작전명이 붙을 정도로 극비리에 추진됐다. 당시 정부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방미 소식을 확인하고 여러 통로로 정상회담을 끊임없이 타진한 끝에 1990년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노 전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회동할 수 있었다. 한국은 수교에 대한 대가로 당시 외환보유액의 15%에 달하는 30억 달러를 소련에 장기차관 형식으로 지원키로 약속하고, 양 정상은 수교 원칙에 전격 합의했다. 이어 1990년 9월 30일 양국 외무장관이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한·소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함으로써 역사적인 수교가 이뤄졌다. 이후에도 양국 정상은 소련과 한국에서 번갈아 정상회담을 열었다. 노 전 대통령은 같은 해 12월 한국 정상으로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해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이듬해 4월에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소련 최고지도자로선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제주도에서 한·소 정상회담을 가졌다. 1992년 8월에는 중국과도 국교를 정상화했다. 같은 해 9월 역시 한국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직접 중국을 찾아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과 회담했다. 회담 직후에는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은 '한중 공동언론 발표문'을 공개했다.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를 통한 화해 분위기 조성은 얼어붙었던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1989년 9월 첫 남북 고위급 회담을 성사시킨 노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 재정립에 나섰고, 이는 1991년 말 남북화해와 불가침을 선언한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과 비핵화 공동선언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1989년 10월 당시 강영훈 총리가 우리 총리로는 처음으로 평양을 찾아 2차 회담을 했고,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이후 남북한 총리가 8차례나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 기본합의서를 탄생시켰다. 합의서에는 남북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군사적 침략행위를 하지 않으며 남북군사공동위원회 구성, 군사당국자 간 직통전화 설치 같은 상호 협력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내용이 담겼다. 이 합의서는 지금도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기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9년에는 분단 이후 첫 통일방안인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자주·평화·민주의 3원칙을 바탕으로 남북연합이라는 중간 과정을 거쳐 통일민주공화국을 실현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은 이후 여러 정권에서 계승됐다. 노 전 대통령은 또 1991년에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라는 성과도 끌어냈다. 당시 북한은 분단 고착화를 이유로 유엔 동시 가입에 부정적 입장을 유지해왔지만 노 전 대통령의 동구권 수교 확대 등의 영향으로 국제무대에서 북한 편에 섰던 소련이 동시가입 지지로 입장을 바꿨고, 중국도 우리나라의 유엔 가입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하면서 북한도 동시가입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후 1991년 12월에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통해 핵무기의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사용 금지, 핵 재처리 시설 및 우라늄 농축시설 보유 금지 등에도 합의했다. 이에 따라 남한 내 주한미군 기지에 배치됐던 핵탄두도 모두 철수됐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이런 북방외교와 남북관계 개선 노력을 통해 남북간 교류 협력을 증진했고 한중간 국교 수립으로 중국과 사회·문화·경제적 교류도 급격히 증가시키는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전 세계적으로 데탕트(긴장 완화)의 조짐이 감지되던 시점에 '반쪽 외교'의 패러다임을 허문 노 전 대통령의 북방외교는 한국 외교사에서 '사고의 전환' 사례로 현재까지도 회자한다. 노 전 대통령은 자율화·개방화에 역점을 둔 경제 정책을 펼치면서 대규모 주택 공급 등으로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켰고, 사회간접자본(SOC) 확충에도 힘을 썼다. 소득 증가와 부동산 투기 등으로 주택난이 심화하자 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에 29만2천호 물량의 1기 신도시를 건설하는 등 총 200만호 주택공급을 지휘했다. 여기에 토지공개념 적용을 바탕으로 한 택지소유상한제, 토지초과이득세, 개발이익환수제 등을 도입해 부동산 시장 안정을 이끌었다. 노 전 대통령은 경부고속철도 건설 계획을 수립해 KTX의 첫발을 뗐고, 인천국제공항 건설에도 착수했다. 그러나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이어진 '3저(저환율·저유가·저금리) 호황' 퇴조 이후에도 고성장 유지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국제수지 악화, 인플레이션 심화 등으로 경제 불안을 초래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1986년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던 한국의 국제수지는 노 전 대통령 재임 때인 1990년 다시 적자로 돌아섰고, 임기 첫해 38.81(2010년=100)이었던 소비자물가 지수는 마지막 해인 1992년 51.73까지 치솟았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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