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22세 풍월주風月主 양도공良圖公(2) |
보스톤코리아 2021-09-13, 11:39:29 |
김양도는 부처를 숭상했다. 여기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었다. 그는 어릴 때 중병을 앓았는데 승려 밀본密本으로 부터 그의 병을 완치할 수 있게 된 후 더욱 불심이 깊어졌다. 그 내용이 삼국유사(권 제3, 권 제5)에 전한다. 먼저 제5권의 밀본密本이 귀신을 쫓아 김양도의 병을 고친 내용을 보면, <또한 승상承相 김양도金良圖가 어린 아이일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서 말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매양 한 큰 귀신이 작은 귀신을 이끌고 와서 집안의 모든 음식을 다 맛보는 것을 보았다. 무당이 와서 제사를 지내면 곧 무리가 모여서 다투어 희롱하였다. 양도가 비록 물러가라 명령하고자 하여도 입이 말을 할 수 없었다. 부친이 법류사法流寺의 이름이 일실된 중에게 와서 경전을 전독하게 청하니 큰 귀신이 작은 귀신에게 명하여서 철퇴로 중의 머리를 쳐서 땅에 거꾸러져 피를 토하고 죽었다. 며칠 후에 사자를 보내 밀본을 맞아오게 하니 사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밀본법사가 제 청을 받아들여 장차 올 것입니다” 라고 하니 귀신들이 그것을 듣고 모두 얼굴빛이 변하였다. 작은 귀신이 말하기를 “법사가 오면 장차 이롭지 못 할 것이니 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자, 큰 귀신이 거만을 부리면서 “어찌 해害가 있겠는가?” 조금 후에 사방의 대력신大力神이 모두 쇠 갑옷과 긴 창을 지니고 와서 귀신들을 잡아 묶어 갔다. 다음으로 무수한 천신天神이 둘러싸고 기다렸고, 잠시 후 밀본이 와서 경전을 펴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그 병이 이제 완치되어 말이 통하고 몸이 풀려서 사건을 온전히 설명하였다. 양도가 이로 인하여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여 일생동안 태만함이 없었고, 흥륜사興輪寺 오당吳堂의 주존인 미륵존상과 좌우보살을 소상塑像으로 만들고 아울러 그 당의 금색 벽화를 채웠다. 밀본은 일찍이 금곡사金谷寺에 머물렀다.>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불심이 깊었던 김양도는 찰흙으로 주존인 미륵존상과 좌우보살을 직접 만들었고, 당시 제일가는 화가답게 당堂의 벽화 역시 직접 그리면서 부처를 신봉하였다. 다음은 제3권에 기록된 내용으로, 진흥왕 5년(544년) 에 완공된 흥륜사에 관한 내용 끝부분에 김양도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부분만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법흥왕이 이미 폐지된 불교를 일으켜 절을 세우고, 절이 낙성됨에 면류관을 벗고 가사를 입었으며, 궁중의 친척들을 내놓아 절의 종으로 삼았다. 절의 종은 지금까지도 왕손이라고 한다. 그후 태종왕 때 재상 김양도金良圖가 불법을 믿었다. 그에게는 두 딸이 있어 화보花寶와 연보蓮寶라고 했는데, 사신捨身350) 을 하여 이 절의 종이 되었다. 또 역신逆臣 모척毛尺351) 의 가족을 이 절의 노예로 삼았는데, 이 두 가족의 후손이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법흥왕은 540년7월에 사망하였다. 같은 삼국유사에 보면 540년 어느날 법흥왕은 왕위를 내려놓고 왕후 보도保道부인과 함께 흥륜사로 출가해 있다가 그해 7월에 사망하였다. 즉 왕과 왕후가 승려가 되어 흥륜사의 주지로 있었으니 당연히 왕족들이 시종으로 함께 흥륜사에 기거하였다. 그 전통은 김양도가 재상으로 있던 태종무열왕(재위 654~661년) 대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화랑세기(1세 위화랑조)에는 법흥왕이 옥진을 총애하면서 왕후 보도를 비구니가 되게끔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화랑세기에는 보도가 소지왕과 왕후 선혜의 딸로 등장하는데 삼국사기에는 박씨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보도는 옥진의 어머니 오도와 이부자매이고, 기오공(흥도의 남편, 흥도는 옥진의 딸이며 진흥왕의 왕후 사도의 동생)과 비조부(8세 풍월주 문노의 아버지)와는 이부 남매이다. 이어지는 화랑세기의 기록은 김양도의 깊은 효심과 우애를 잘 나타내고 있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어머니 양명공주는 진평대제의 딸이다. 제帝는 공의 총명함을 사랑하여 늘 궁중에 불러 들여 내사內賜를 많이 했다. 공은 스스로 가지지 않고 번번이 공주에게 바쳐 동기들과 고르게 나누었다.] 350) 사신捨身이란 수행, 보은報恩을 위하여 속계에서의 몸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함을 말한다. 또한 불사나 불도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351) 모척은 대야성 성주 김품석金品釋의 막료였으나, 642년(선덕여왕 11년) 백제의 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공격할 때 백제군과 내통하고 검일黔日과 공모하여 성 내의 군량미 창고에 불을 질러 신라군을 곤경에 빠뜨렸고, 결국 성주 품석은 가족과 함께 자살하면서 성은 함락되었다. 성이 함락된 후 백제에 귀부歸附하였으나, 660년 백제가 항복한 뒤 검일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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