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효의황후(孝懿皇后), 순목황후(顺穆皇后) 묘가 발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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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톤코리아 2021-08-23, 11:23:37 |
중국 당국은 지난 2004~2005년 길림성 화룡시 용해촌에 있는 발해 고분군 유적인 용두산 고분군에 대한 발굴 성과를 발표하였다. 이곳에서 발해 3대 문왕의 황후인 효의황후 묘와 9대 간왕의 황후인 순목황후의 묘지가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진작에 알려졌지만 중국학자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10여년동안 전모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용두산 고분군은 발해 문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와 네째 딸 정효공주의 묘가 발굴된 곳이고 이번에는 문왕의 황후 효의황후의 묘가 발굴되었다. 순목황후는 9대 간왕의 황후이며 성은 태(泰)씨이다. 황후 재위기간은 818년부터 일년 남짓에 불과했지만 간왕 사후 12년간 생존했다. 간왕을 마지막 왕으로 하여 대조영의 직계 후손 대가 끊기고 대야발의 후손이 선왕으로 대를 잇게 된다. 발해 황후 발굴 보고서를 확인한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묘지에 황후라는 호칭을 썼다는 것은 발해가 지방정권이 아니라 황제국을 지향했다는 증거이고 무덤양식이나 부장품을 보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새의 날개 이미지를 세가닥으로 갈라진 식물의 이파리처럼 표현한 금제 관식은 고구려 조우관의 전통이 발해에까지 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물자료"라고 평가했다. 진한, 변한에서는 장사를 지낼때 큰 새의 날개를 집앞에 매달곤 하였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가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지금도 한국인들은 부락제때 솟대에 새를 올려 놓는 것은 새를 천계와 인간의 땅을 연결하는 매개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보이는 발해 황후묘의 금제 관장식, 고구려의 조우관, 신라 천마총의 금제 관장식은 새를 숭배해 왔던 우리 민족 사상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황후묘를 발굴한지 이제는 10여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묘를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이것은 중국학계에 불리한 증거가 너무 많이 나와서 발표를 계속 보류하고 있는듯 하다. 중국의 학자들은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국가라고 주장해 오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에 대한 정보는 의식적으로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대조영이후 무왕, 문왕, 강왕은 한결같이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사서에 기록된 사실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신당서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멸망 당시에 고구려 가구수가 65만호에 인구가 350만이었다. 이중 당나라, 신라, 몽고로 이주한 사람이 30만이었고 나머지 300만명 이상의 고구려인이 발해를 건국하였으니 대부분의 발해인들은 고구려 사람들이었다. 지배층, 피지배층 모두가 고구려 사람들이었다. 중국의 해석은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은 말갈 사람이라는 것이다. 중국학자를 제외하고 이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국은 당서에 기록된 좌효위 장군의 책봉을 예로들어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공 책봉을 했다고 해서 그나라가 중국왕조의 속국이라고 부를 수는 전혀 없다. 당나라때에 베트남과 왜국이 조공을 바쳤는데 그들을 속국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발해 무왕이 당나라의 등주와 만리장성 마도성을 공격해서 당나라를 한때 굴복시킨 적이 있었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한번 장군 지위를 받았다고 수백년을 두고 우려 먹는 행태는 바람직한 행위가 될 수 없다. 대조영은 이제는 일국의 왕이 되었으니 그에 맞는 대우를 해드려야만 한다. 발해 문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 중국 길림성 연변족 자치구 돈화시에서 발해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가 육정산(六頂山) 고분에서 1949년에 발굴되었다. 발해 문왕에게는 황위 계승자인 장남 대광림이 있었고 네명의 딸이 있었는데 장녀와 셋째 딸은 일찍 사망해서 둘째 딸 정혜공주가 사실상 장녀 노릇을 했는데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일찍이 사망했고 그녀 역시 40세를 일기로 777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정혜공주의 모후가 바로 효의황후로 문왕이 공주를 지극히 사랑하여 정사에 나가지 않을 정도로 크게 슬퍼하였다고 한다. 정혜공주의 묘는 고구려 양식인 굴식 돌방 무덤으로 굴이 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모줄임 돌방 무덤으로 되어 있고 두개의 돌사자상이 발굴되었다. 이번에 정혜공주묘의 발굴이 중요한 뜻을 가지게 된 것은 공주의 묘비에서 귀중한 발해사의 내용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문왕의 존호가 "대흥 보력 효감 성법 대왕(大興寶曆孝感聖法大王)"이었던 것은 문왕과 공주와의 관계를 설명한 구절에서 밝혀졌다. 대흥과 보력은 모두 문왕의 연호이며 대흥 37년에 보력으로 개원(改元) 되었다가 왕의 말년에는 다시 대흥의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정혜공주의 비문출토로 발해 제 2대왕 대무예의 능이 진짜일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비문에 기록된 문장을 통해 시경, 서경, 예기를 비롯해 굴원의 초사 같은 문장을 읽은 사람이 아니고는 쓸 수 없는 중국문학의 진수를 엿보이게 하고 있었다. 문제는 정혜공주가 사망하고(777년) 나서 15년후에 네째 동생 정효공주(757~792)가 사망했고 역시 똑같은 육정산 고분에서 1980년에 발굴하였는데 두 공주의 비문이 생년월일만 다를 뿐 나머지는 똑같은 문장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정효공주가 사망하고 바로 그 다음해에 발해 문왕도 사망했는데 왕위 계승자였던 대광림과 네명의 딸들은 모두 사망한 뒤였다. 문왕은 재위 57년으로 한국의 어느 통치자도 그의 집권 기록을 깨지 못했다. 발해 문왕의 막내딸 정효공주 문왕의 막내딸 정효공주는 792년, 대흥 56년에 36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다. 15년전인 서기 777년에 둘째 공주 정혜공주가 사망했는데 이번에는 막내공주 정효공주가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해 겨울 11월 28일에 염곡(染谷) 서쪽에 예에 따라 매장하였고 시호를 정효공주로 하였다. 정효공주에 대한 기록은 공주의 비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생년월일만 다르고 나머지 기록은 정혜공주의 비문과 동일하다. 정효공주를 남편과 딸이 일찍 죽은뒤 평생 수절했는데 무덤에 두 남녀의 인골이 함께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이곳에 공주와 남편의 관이 각각 올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가 묻혀 있었던 용해 고분에서는 정효공주 말고도 발해 제3대 문황의 황후 효의황후(孝懿皇后)와 발해 9대 간왕의 황후 순목황후(顺穆皇后)의 무덤이 발굴되어 이곳이 8세기부터 9세기초 발해 왕실의 고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효의황후는 정효공주의 친모가 된다. 무덤을 조성하는 방식은 벽돌로 쌓는 당나라 양식과 돌로 공간을 줄여 나가면서 천장을 쌓는 모줄임 방식을 결합하는 방식이었다. 또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무덤위에 탑을 쌓는 방식은 발해의 독특한 건축술이었다고 한다. 정효공주묘에는 묘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말한바 있었지만 또 한가지는 벽화가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널길의 동서 벽과 널방의 동, 서, 북벽에 그려진 12명의 인물도는 무사(武士), 시위(侍衛), 내시(內侍), 악사(樂師)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평소에 공주를 시중들던 사람들을 담고 있다. 모두 12명이 정효공주 무덤안에 그려져 있는데 모든 인물들은 당나라 풍의 옷을 입고 있어 정효공주 무덤이 조성될 무렵에는 이미 당나라 문화를 수용해 그 복식까지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었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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