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오천축국전 2 |
보스톤 전망대 |
보스톤코리아 2021-02-08, 13:15:31 |
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은2010년 12월 14일 한국에 들어와 2011년 3월 17일까지 60cm만 전시하게 되었다. 왕오천축국전을 소장하고 있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① 대여기간은 3개월, ② 60cm이상 전시하지 말 것 등의 조건을 내걸고 전시를 허용하였던 것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원래 3권으로 편찬되었으나 현존본은 약본이며 앞뒤 부분이 유실되어 내용 중에 천축까지 항해하는 과정이 빠져있다. 혜초의 기행은 법현의 불국기처럼 문학적 소양도 부족하고 현장의 대당 서역기처럼 자세한 서술도 없지만 8세기 전반 천축국의 지리, 풍속, 역사, 종교, 생활풍습을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여행기는 동천축국 사람들이 옷을 하나도 입지 않고 나체로 산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유는 옷을 만들기 위해 동식물을 살상하지 않으려고 그리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에서는 가축을 잡거나 고기를 파는 것을 볼 수 없다. 천축 전역에서는 살생이 없고 소를 통해서 얻는 것은 오로지 우유와 버터뿐이다. 낙타, 노새, 당나귀, 돼지 등의 가축을 식용으로 기르지 않고, 양과 말은 숫자가 적어 오직 왕만이 이를 소유하고 있다. 이곳은 기후가 따뜻하여 온갖 풀이 자라고 눈과 서리를 볼 수 없다. 쌀, 보리, 떡을 먹으며 간장은 없고 소금을 먹는다. 왕이나 벼슬아치, 부자들은 전포로 만든 옷을 입는데 옷을 직접 만들어 입는 사람들은 한가지 옷뿐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반조각만 몸에 걸친다. 길에는 도적이 많다. 그러나 물건을 뺏고는 그대로 놓아주며 다치게 하거나 죽이지는 아니한다고 한다. 천축국에서는 목에 칼을 씌우고 매를 때리거나 형벌을 주는 감옥이 없다.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그 경중에 따라 벌금을 물리는데 사형에 처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혜초는 왜 인도에 가려고 했을까? 무릇 승려라면 불법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혜초는 "급기야 마하보디사(大覺寺)를 보고는 내 소원에 맞는지라 너무 기뻤다"라고 그의 뜻을 오언시(五言詩)로 그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깨달음이 멀다고 걱정 않는데 어찌 녹야원이 그리 멀다 하리오 가파른 길 험하다고 근심할 뿐 업풍이 몰아쳐도 개의치 않네 여덟탑 보기란 정말 어려운데 오랜 세월 겪으며 거의 타버렸으니 어찌 뵈려는 소원이 이루어 지겠는가 (하지만) 바로 이 아침 내 눈으로 보았노라 간단하게 해설하면, 붓다는 마하보디사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었으니 이번에는 250km나 떨어진 녹야원(사슴 공원)으로 5 비구니를 보러 가려는 것이다. 8개 탑을 다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오늘 아침에는 급기야 마하보디 대탑을 보게 되었다고 기뻐하고 있었다. 부처님의 생애 싯달타는 직접 미래의 순례자들에게 태어날 곳, 깨달을 곳, 설법할 곳, 죽을 곳 네 장소를 미리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네팔의 테라이(Terai) 지방의 룸비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마야데비(Maya Devi) 부인이 당시의 관습에 따라 친정 데브하라 콜리 성으로 가던 중, 무우수 아래서 나무가시를 잡고 진통하여 부처를 낳았다고 한다. 싯달타는 태어나자 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는 탄생계를 외치었다. 이 말은 "하늘위 하늘아래에서 우리 인간이 가장 존귀하도다.”라는 뜻이며 이어 부처는 “모든 일체의 괴로움을 내 중생들을 위해 기필코 그치게 하리라"며 대구를 마무리 지었다. 싯달타가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은 것은 우주 만물 윤회의 길인 육도(六道)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열반의 길에 도달했다는 뜻으로 그가 부처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싯달타의 아버지 정반왕은 4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아들을 얻었다. 어머니 마야 부인은 7일만에 세상을 떠났고 정반왕은 부인의 동생과 재혼했다. 싯달타는 후처가 된 이모에 의해 양육되었다. 16세(19세?)에 결혼해서 아들을 얻었으나 29세때 출가하였다. 많은 스승을 모시고 수도하였으나 누구도 태자가 알고 싶어했던 "죽음과 삶의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주지 못하자 육신을 학대함으로 해탈할 수 있다는 극한의 수련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6년의 고행으로도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몸은 너무 쇠약해져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 그는 육체적 고통을 참아온 수행방법에 회의가 들기 시작하였다. 마침 양떼를 먹이려고 나온 수자타라는 처녀가 그에게 정성스럽게 우유죽을 공양하였다. 싯달타는 이 우유죽이 천상의 이슬과 같은 감로였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싯달타와 함께 구도를 위한 수행이라면 어떤 고행도 망설이지 않던 5명의 수행자들은 수자타가 제공하는 우유죽을 먹는 붓다를 지켜보며 그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탄식하고는 녹야원으로 떠나갔다. 붓다는 "나의 몸이 무너져 살과 뼈가 마르고 썩어 그 몸이 무너져 없어진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도를 이루지 못한다면 끝내 일어나지 않으리라" 며 계속 정진하였다. 그리고 보리수 아래에 앉아 정진한지 7일째 되던 날 새벽, 새벽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얻은 깨달음은 "나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위대한 진리였다. 이 깨달음을 우리는 정각(正覺, Abhiambodhi)이라고 한다. 그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고통과 번뇌를 스스로 끊을 수 있었고 무한히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부처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부근에서 49일을 명상하며 보냈다고 한다. 이때부터 싯달타는 스스로를 붓다(Buddha), 즉 "깨달은 자"로 불렀다. 금강보좌는 세존이 깨달음을 얻은 자리로 앞에는 보리수 한그루가 심어져 있었고 서쪽에는 세존이 고행을 끝내고 목욕을 한 연못이 남아 있다. 세존 생존시에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깨달음을 나무, 즉 보리수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다 가야에서 이 나무의 높이는 수백척에 달했으나 그동안 몇 차례나 벌채되는 수난을 겪었다. 높이 10m에 달하는 현재의 보리수는 원래 보리수의 4대 손자에 해당된다. 스리랑카의 아누라 다푸라 사원에 있는 스리마하 보리수 묘목을 가져다 심었는데 스리랑카 보리수는 아쇼카 왕이 불교 전파를 위하여 자신의 딸 상가미타 비구니를 파견할 때(BC 288) 함께 보냈던 묘목이라고 한다. 녹야원(사르나트)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에서 250km나 되는 먼거리에 있었다. 부처님은 고행을 함께 한 5명의 도반을 만나려고 먼 길을 떠났고 이들을 만나 최초의 설법을 하게 되었다. 그가 설법을 시작한 이유는 진리를 얻기 위하여 함께 고행했던 5명 도반과의 인연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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