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13세 풍월주風月主 용춘공龍春公(11) |
보스톤코리아 2020-02-10, 10:32:04 |
진평왕은 신라에서도 석가모니가 태어나길 간절히 기원했지만, 싯다르다는 고사하고 왕통을 이을 적자도 태어나지 않았다. 정비 마야부인은 딸만 둘(셋 또는 넷) 출산하고 일찍 사망하였다. 마야부인의 정확한 생몰년 기록은 없는데 화랑세기에는 선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선덕여왕은 632년에 즉위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선덕이 장녀로 천명이 차녀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서열 없이 나오며 선화공주도 등장한다. 선화공주는 마를 캐는 청년 서동의 연인으로 후일 서동은 백제의 무왕이 되었고, 선화는 왕비가 되었다.187) 화랑세기에는 천명이 장녀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 한 명의 딸인 천화공주가 등장한다. 그런데 마야부인의 명으로 장녀인 천명이 용수와 혼인할 때 천화는 이미 용수의 아내였다. 천화가 장녀일 개연성도 있다. 한편 진평왕의 후비 승만왕후는 왕자가 출산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다. 마야부인이 생존했을 때는 진지왕의 아들들인 용수나 용춘에게로 후계를 이을 계획을 하였는데, 공주들이 성장하면서 왕실의 분위기는 변모되었다. 특히 선덕공주는 자라면서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 龍鳳之姿 天日之表’ 이 왕위를 잇기에 충분하였다. 선덕은 총명하였고 지혜로웠으며 감정이 풍부하였다. 그래서 진평왕은 장녀 천명에게 그 지위를 선덕에게 양보하기를 권했고, 천명은 부왕의 명에 순종하고 출궁하였다. 이종욱은 ‘천명이 그 지위를 선덕에게 양보하고 출궁’ 한 부분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진평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성골 집단에는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천명과 선덕이 한 대에 한하여 성골 신분으로 왕위 계승권을 가졌음을 잘 보여준다. 당시 성골 집단은 왕궁인 3궁에 거주했고, 출궁을 하면 신분과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고 여겨진다. 진평왕의 딸이며 선덕왕의 언니인 천명이 출궁出宮함으로써 왕위를 포기했다는 기록이 이것을 잘 설명해 준다. 이 때 천명의 신분은 성골에서 진골로 바뀌었을 것이다.”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 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220쪽) 이렇게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을 가진 선덕은 부왕 진평왕의 허락을 받아 김용춘을 사신私臣으로 삼고자 했다. 용춘은 ‘총명하고 지혜롭고 감정이 풍부한’ 선덕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사양했지만, 왕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과연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용춘이 물러나고 형 용수가 선덕을 모셨는데 또한 자식이 없었다. 이 때 진평왕의 후비 승만왕후가 아들을 낳았다. 씨가 말라가는 성골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미 차기 왕위 계승자로 정해진 선덕을 대신하고자 했는데 그 왕자는 조졸하였다. 게다가 진평왕의 동생들인 백반과 국반도 아들이 없었다. 또한 631년5월(진평왕 53년)에 칠숙이 난을 일으켰으니 왕궁은 어수선하였다. 칠숙의 난은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두 사서 모두 그 원인이나 목적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 후세 사람들에게 많은 궁금증을 불어넣으며 많은 ‘연구’를 하게 만든다. 먼저 삼국사기(선덕여왕 본기)의 기록을 보면, “여름 5월,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반란을 꾀하였다. 임금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붙잡아 동시東市에서 목을 베고 아울러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에 이르렀으나, 처자가 보고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걸어 총산叢山까지 돌아오다가, 한 나무꾼을 만나 헤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바꿔 입고 나무를 지고 몰래 집에 왔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다음으로 화랑세기(17세 염장공조)의 기록은 직접적인 언급은 간단하지만 조금 더 구체적이다. “염장공은 유신공의 부제로서 춘추공을 부제로 삼아 지위를 넘겨 주었다. 염장공은 선덕공주에게 몰래 붙어 칠숙柒宿의 난을 다스리고, 그 공功으로 발탁되었다. 선덕이 즉위하자, 들어가 조부調府의 영令이 되어 유신과 춘추에게 재물을 공급하여 주었고 또한 사적으로 치부를 했다.” 진평왕은 재위 54년인 632년 정월에 세상을 떴다. 그리고 선덕공주가 진평왕을 이어 신라의 제 27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632년의 일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여왕이 탄생하였다. 한편 칠숙의 관위 이찬은 2등급으로 진골만이 할 수 있는 관등이었다. 아마도 성골의 왕자가 없는 가운데 왕위가 여자에게로 이어지는데 반발하여 칠숙이 난을 일으켜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그의 역할이 없는데 화랑세기에는 풍월주 염장공이 김유신과 김춘추와 함께 칠숙의 난을 제압하는데 공헌했다. 17세 풍월주 염장공조에서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염장廉長은 이름의 뜻과는 반대로 욕심이 많은 인물로 치부致富와 이재理財에 밝았다. 187) 2009년 까지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여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만이 백제 무왕의 왕비로 알았는데, 2009년 1월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할 단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 의 기록에 따르면 무왕의 왕비는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라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그녀가 미륵사를 창건하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史實인가? 아니면 그냥 설화인가? 학계 일각에서는 당시 백제의 왕은 2명의 왕비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비록 설화적인 요소가 있지만 선화공주도 왕비였다고 본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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