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르고의 횡설수설 2 ] 너무 늦은 귀향
보스톤코리아  2019-10-28, 10:19:29 
“아버지, 아들이랑 고향에 오니까 좋으시죠?” 아직 봄은 오지 않고, 양지바른 언덕에 고사리만 머리를 빼꼼히 내밀고 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이다. 태어난 집, 진달래를 꺾던 앞산, 시장에 가신 엄마를 기다리던 언덕, ... 변한 게 있다면 모든 것이 작아 보인다는 것. 어릴 땐 그렇게나 커보였는데. 아버지는 말없이 희미한 미소만 지으신다. 

아버지랑 단 둘이 여행을 한 것이 언제였던가? 40년 전 초등학교 입학 무렵이었지 아마.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었다. 아버지는 괴나리봇짐을 진 채 이른 조반도 없이 잠든 나를 깨워 길을 떠나셨다. 나는 바람에 펄럭이는 아버지의 두루마기가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반쯤 뛰고 반쯤 걷다보니 잠도 깨고 추위도 잊을 만 했다. 한 나절을 걸어 마침내 어떤 집에 도착했다. 고모할머니란 분이 조카가 왔다면서 무척이나 반가워하셨다. “자네 이거 한 잔 드셔보게나.” 화로에 올려놓은 주전자에서 검은 액체가 미끄러져 나왔다. “아이고, 고모님, 귀한 고히(커피)를 다 주셔요.” 참으로 의아했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제일 센 줄 알았는데. 도대체 이 할머니가 누구이기에 아버지께서 이렇게 공손하실까. “너도 마셔볼래?” 그 검은 액체는 한약보다도 더 쓴 맛이 났다. 

마당에는 아직도 밤나무가 온 마당을 가린 채 늠름히 서있다. 그 옆에는 사과나무, 그리고 그 옆으로는 노란 매화가 여전히 살아있다. 수십 년을 버티며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몇 번은 족히 집주인이 바뀌었을 텐데 나무들을 그대로 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아버지, 생각나세요? 이건 아버지가 접을 부친 사과나무잖아요.” 아버지는 또 옅은 미소만 지으신다. 뒤뜰의 배나무는 밑동이 거의 썩은 채 스러질 듯하다. 흐른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버거운가보다. 

“아버지, 글라디올러스도 심어야죠? 여기 닭장 앞에다가.” 해마다 아버지는 온갖 화초들을 심으셨다. 작약, 금잔화, 봉숭아, 채송화, 글라디올러스, 백합, ... 아버지는 꽃을 좋아하셨다. 봄이면 동네 아낙들이 일부러 꽃구경을 오기도 했다. 밭일이 없는 날 아버지는 버섯을 채취하러 산에 가시곤 했는데, 돌아오실 때마다 예쁜 야생화를 꺾어다 우리에게 주곤 하셨다. 아버지는 대답이 없으시다. 화초 가꾸는 일이 이제는 당신 일이 아니라는 듯하다.

아버지는 재주가 많으셨다. 이발, 침술, 관상, 가례 등등. 비가 와서 농사일을 못하는 날에는 이른 아침부터 동네 사람들이 들이닥치곤 했다. 침을 놔 달라, 주사를 놔 달라, 이발을 해 달라, 택일을 해 달라, 등. 아버지는 이 모든 일들을 비용도 받지 않고 해주셨다.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답례로 고구마, 보리, 옥수수 등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농기구도 직접 만드셨고 우리에게는 썰매, 팽이, 연 등 온갖 장난감을 만들어주셨다. 눈 내린 겨울엔 꿩을 잡으셨다. 메주콩에 홈을 파고 청산가리를 채워 미끼로 쓰셨다. “아버지, 이번 겨울에도 꿩 잡아요. 아버지 좋아하시는 장끼(숫꿩)가 많이 잡힐 거예요.” 

나는 마당을 한 바퀴 돌아 언덕을 따라 개울로 내려간다. 온 몸이 잠길 정도로 깊어 미역을 감곤 했던 개울이 지금은 바닥조차 거의 말랐다. 물 자욱이 남은 바위들만이 그것이 한 때 개울이었음을 말해줄 뿐이다. 강산이 변하는 건 자연의 이치건만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서글픔을 억제할 수가 없다. “아버지 생각나세요? 바로 여기서 개구리도 잡고 운이 좋은 날이면 버드쟁이도 몇 마리씩 잡곤 했었잖아요?”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아버지의 시선 속에서 나는 그리움을 본다. 

개울가 바위들 사이로 통나무가 보인다. 아, 귀새가 아직도 있구나.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니. 한 방울의 물이라도 논에 더 보내기 위해 통나무를 파서 만든 물길이다. 모내기철에는 물을 나누어 써야 하는 이웃들 사이에 논물 싸움이 자주 일어나곤 했다. 봄에는 논물 걱정, 가을에는 지주에게 바칠 도지걱정으로 아버지는 한 평생을 보내셨다. “아버지 이젠 논물 걱정 안하셔도 돼요.” 나는 들릴락 말락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고 숨이 막힌다. 목이 멘다. 왈칵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흐려진 시야 속으로 아버지의 희미한 미소가 흔들린다.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게 온 거죠?” 나는 아버지의 사진을 지갑에 넣는다. 


올댓보스톤 교육컨설턴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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