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66 |
화랑세기花郞世紀, 11세 풍월주風月主 하종夏宗(7) |
보스톤코리아 2019-03-11, 10:52:55 |
화랑세기 서문에는 화랑의 유래와 변천과정을 아주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서문의 첫 구절은 "화랑은 선도仙道이다. 우리나라에서 신궁神宮을 받들고 대제大祭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나라의 동산, 노나라의 태산과 같다. 옛날 연부인이 선도를 좋아해 미인을 많이 모아 이름하기를 국화國花라 했는데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여자로 원화源花를 삼게 했다.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해 국인國人들에게 그를 받들게 했다." 위 기록을 다룬 상세한 내용은 본서 '화랑세기, 서문(1~4)'의 참조를 바라며, 여기서는 '신궁'에 대해서만 보면 신궁은 대제를 올리는 곳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화랑의 전신인 원화와 화랑이 신궁의 제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이 대제를 주관하는 '신관神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다음은 4세 풍월주 이화랑전에 등장하는 '신궁'이다. 그런데 이부분은 훼손이 너무 심하여 신궁이란 단어 외에는 알아낼 만한 것이 없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왕 … 신은 마땅히 신궁神宮에서 발원하여 … 그런즉 맹세하여 얻지 못하며… 궁은 무릇 17…" (이하생략) 앞뒤로 더 인용한다고 해서 신궁에 대하여 얻어낼 정보는 조금도 없다. 여기서는 다만 신궁이 '발원하는 장소'라는 소득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다음은 5세 풍월주 사다함전 마지막의 사다함의 세계世系에 등장하는 '신궁'이다. 여기서는 내물신궁奈勿神宮으로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역시 본서 '5세 풍월주 사다함전'에서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다만 마지막 문장인 "눌지왕이 이에 심황에게 명하여 내물신궁의 주主로 삼았다" 라는 부분에서 '주'는 아마도 신관神官으로 임명했다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리고 8세 풍월주 문노는 신궁에서 윤궁과 결혼식을 올렸다. 김춘추와 문희도 신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궁은 이렇게 혼례와 길례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11세 풍월주 하종과 하종의 이부동생 수종壽宗을 전군殿君에 봉하는 의식도 신궁에서 치러졌다. 하종은 미실이 남편 세종전군과 낳았고, 수종은 진흥왕과 낳았다. 전군의 아들은 전군이 될 수 없음에도 진흥왕은 미실을 총애했기에 하종을 양자로 삼아 수종과 함께 전군에 봉하였다.157) 그들을 전군에 봉하는 의식은 수종이 태어난지 77일158) 되는날 행하였다. 진흥왕은 미실과 더불어 하종, 수종과 함께 수레를 타고 신궁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하종과 수종의 전군 봉례의식을 행하였다. 두 전군의 어미가 된 미실의 기쁨은 더 할 수 없었다. 이에 진흥왕은 축하 잔치를 베풀었다. 신궁은 현존하는 포석정과 함께 쌍으로 있었다. 즉 화랑세기에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포(석)사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포석정의 기능이 후대에 잘못 전해진것 같다. 927년11월 추운 어느날 견훤이 경주를 침공했을때, 경애왕은 대적하여 싸우지는 않고, 왕비와 궁녀들, 친지들과 대신들을 데리고 유상곡수를 즐기며 향연을 베풀다가 나라를 잃고 자결을 하였다는 기록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경애왕은 주연을 즐긴것이 아니라 문노 등의 대영걸을 모신 사당인 포석사에 나가서 마지막으로 왕이 할 수 있었던 의식, 즉 나라의 안위를 기원하며 호국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음이 더 설득력 있게 보여진다. 당시 경애왕은 이미 후삼국의 정세와 견훤의 침공 및 고려의 구원병이 오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쇄락한 국력으로 견훤의 군사를 막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음력 11월이면 연중 가장 춥고 일조량이 짧은 시기인데 야외에서 '황음'에 빠졌다는 기록은 설득력이 부족하다(자세한 논박은 본서 '8세 풍월주 문노전'을 참조바람). 새로운 전군들을 위한 축하연이 시작되면서 진흥왕은 태자 이하 왕자, 전군들에게 명하여 미실에게 예를 올리고 어머니라 부르도록 하였다. 당시 동륜태자는 이미 미실과 사통한 바 있기에 억지로 절을 하려하자 이에 미실이 태자는 무릇 왕자/전군들과 다른데 어찌 배례를 하느냐며 절받기를 거부하였다. 당시까지 진흥왕은 동륜태자와 미실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때는 진흥왕 33년(572년), 한편 미실과 더불어 왕의 총애를 다툴 수 없었던 보명이 밤마다 쓸쓸히 궁宮을 지키고 있었다. 157)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전군의 아들도 전군이 될 수는 있다. 심지어 친부가 전군이 아니더라도 가능하다. 바로 하종의 아버지 세종의 경우이다. 세종전군의 아버지 태종은 전군도 아니었지만 세종의 어머니 지소가 태후였기에 세종은 전군이 될 수 있었다. 즉 전군이란 정궁正宮의 소생이 아닌 왕자들이나 정궁이 왕이 아닌 다른 남자와 사통해서 낳은 아들이다. 진흥왕은 미실이 수종을 출산했을때 너무나 기뻐서 하종을 전군으로 봉하려했지만, 신하 삼호공三好公의 반대로 잠시 미루었다가, 삼호공을 면직한 후 양자(원문에는 가자假子로 되어있다) 로 삼아 전군에 봉하였다. 158) 원문에는 "殿君封禮行于壽宗殿君七十七日전군봉례행우수종전군칠십칠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종욱은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에서 77일로 옮겼고(177쪽), 김태식은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에서 이종욱의 77일로 옮긴걸 잘못이라고 반박하면서, '칠칠일'은 불교의 49재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라며 49일로 옮겼다(81쪽)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www.gch.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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