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빛 (마지막)
보스톤코리아 연재소설
보스톤코리아  2018-06-11, 12:28:56 
아예 아무 말도 모르는 베트남 여자나 네팔 여자들은 얼굴의 표정도 없이 자신의 일만 하면 되지만 량은 몇 가지의 단어를 알아듣고 그 당시의 상황에 맞게 조합하여 추측한다. 중국보다 더한 이 계급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는 그 바닥에서 고개도 들 수 없고 무릎을 펴서도 안되는 자본주의의 바닥을 지탱하는 노예에 불과한 것이었다. 물론 유니언이나 종업원을 관리하는 곳이 있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 그들이 보호하는 종업원은 그냥 생각 없이 시키는 일만 하며 그들을 위해서는 간과 쓸개를 다 빼놓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그 윗선을 이용하여 보호하고 관찰한다. 량은 어떻게 해서든 이 사회를 뚫고 지나야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슈퍼바이저는 툭하면 “저 바보들..”하며 혼잣말을 하면서 지나간다. 어떤 노인에게는 “욕심이 모가지까지 차서 늙어서까지 죽자고 일을 하는군” 한다. 어느 날은 “상식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것들…” 이런 말을 알아듣고는 처참해졌다. 량은 자신의 욕망이 자신을 어떻게 기존의 틀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도록 했는지를 안다. 아니 그게 꼭 망가졌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 욕망을 포기할 수 없다. 자신을 위해, 자신이 자각한 대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존재 이유를 향한 물음이 그토록 나쁜 것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량은 자신보다 수백 배는 더 진화된 여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신참으로 던져진 것이다. 이곳의 매니저로 있었던 남편은 이 세계의 생태를 누구보다 잘 안다. 은행의 계좌도 만들지 못해 남편이 만들었다. 돈을 벌어도 남편이 관리하고 량은 용돈을 타서 써야 한다. 왜 남편이 쉽게 자신이 취직을 해야겠다는 말에 동의하고 일자리를 알아봐 주고 차로 태워다 주며 태우러 오는가에 대한 이유다. 남편의 친구들이 중국 여자들과 결혼했지만 모일 때 절대로 여자들을 데리고 오지 않는다.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것을 최대한 막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민주 사회에서 언제까지 막을 수는 없지만 40이 넘고 50이 넘은 여자들이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눈을 떠 사회생활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 자본을 떠받치고 있는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에 엎드려서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고 기계처럼 일을 하는 것, 이것만을 허락한 사회에 던져진 것이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일하는 백인 남자 한 명이 종업원들 사이를 돌며 이것저것 물어본다. 위생 검사를 하는 것이다. 남자는 량 앞에 서서 냉장고는 몇 도 정도가 적당한지를 물었다. 량이 알아 들었다. 40도라고 말하자 영어를 알아듣는 종업원이 있다는 것이 신기한지 몇 가지를 더 묻는다. 량이 대답한다. 네 가지의 질문 중 세 가지를 대답했다. 량은 눈을 인형처럼 깜박이며 말했다. 남편이 말했었다. 
“넌 눈을 깜박이며 말할 때 가장 매력적이야. 나를 꼼짝 못하게 하지.” 
모든 남자들이 그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량은 최대한 여자 냄새를 풍기려고 노력했다. 량이 남편과 약국에 갔을 때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남편이 약을 사는 사이에 몰래 립스틱을 샀다. 꽃분홍 립스틱. 남편이 직장에 데려다주면 라커룸에 들려 옷을 갈아입는다. 모자를 쓸 때 앞 머리카락 몇 올을 빼내 살짝 구부려 옆으로 놓는다. 그리고 립스틱을 바른다. 자신에게 상냥했던 백인 남자가 지나가길 기다린다. 보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그 남자를 기다린다. 온다 해도 량에게 다시 말을 붙일 확률은 거의 없지만 량은 고양이처럼 그 남자의 주위에서 단 몇 마디라도 하고야 만다. 어느 날 량이 화장실을 다녀오다 그 남자가 다른 남자와 나누는 대화 중 몇 가지의 단어를 알아듣는다.
(여자, 중국, 말, 립스틱, 섹스, 어떻게….)

이후 량은 립스틱을 발랐을까? 안 발랐을까? 직장을 계속 다녔을까? 안 다녔을까? 중국으로 돌아갔을까? 계속 미국에서 살까? 이런 상식적 의문은 이미 그 사회에서 소용이 없다. 량에게 남자가 낚였거나 남자에게 량이 낚였거나 하는 것도 별 의미 없다. 량은 남편과 계속 잘 살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 사이 남편은 더 늙어 병이 들었지만 량은 지극 정성으로 간호했다. 은행을 가는 일은 이제 량의 몫이다. 물건을 사는 일도 량의 몫이고 남편의 약을 챙기는 일도 량의 몫이다. 남편의 어눌한 몸짓 때문에 물이 엎질러지면 량의 목소리는 상냥하다. “가만히 계세요. 제가 다 해요.”라고 말하면 남편은 빤히 량을 쳐다보다가 정말 가만히 앉아 있는다. 가끔 직장의 백인 남자가 물건을 사러 갈 때 채소의 신선도를 봐야 한다는 이유로 량을 데리고 나간다. 어떤 날은 집으로 오기도 한다. 량은 슈퍼바이저와 나란히 서서 새로 들어온 종업원을 길들이는 방법을 함께 논의하고 있다. 량은 그 울타리 내에서 가장 빠르게 진화한 것이다. 휴일 날이면 색색의 실을 사다 모았다. 천도 골고루 다섯 마씩 끊어다 놓았다. 하나의 원피스를 만들 때마다 살아온 세월을 박음질한다. 원피스를 입고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높은 구두를 신는 동안 거울 속의 풍경을 본다. 파란 하늘과 목이 긴 붓꽃들이 가득 핀 마당을....

-나를 괴롭히던 둥글둥글한 빛들은 유리바닥 밑으로 아직도 떨어지지. 나에게는 너희들이 말하는 순수함이 없을 거라고 하겠지. 그래서 난 연극을 해. 너희들의 상식을 지켜주기 위해. 너희들의 상식은 너무 비겁하지만 적당히 존중해 줄게. 난 말이지 최대한 나를 낮추며 살아. 그게 뭐 어때서? 사람들의 진화 속도와 내 속도가 다른 것뿐이지만 난 최대한 속도를 내어 살려고 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빛 속에 앉아 이제는 머리를 빗을 수도 있어. 그리고 어린 계집아이에게 내가 만든 원피스를 입혀보는 거야. 나 잠시 쉴게. 욕망의 도구가 된 기억. 욕망이 망가뜨린 관계. 다 발아래에 두고 나는 오늘도 눈을 깜박이지. 계단이 너무 높아. 아직도 난 바닥이란 말이지.


유희주 작가
유희주 작가는 1963년에 태어나 2000년『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인간과 문학』에 소설 『박하사탕』을 발표하며 소설 작품 활동도 시작했다. 시집으로 『떨어져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엄마의 연애』, 산문집으로 『기억이 풍기는 봄밤 (푸른사상)』이 있다. 
유희주 작가는 매사추세츠 한인 도서관 관장, 민간 한국 문화원장, 레몬스터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코리안릿닷컴(koreanlit.com)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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