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73 |
화랑세기花郞世紀, 6세 풍월주風月主 세종世宗(2) |
보스톤코리아 2017-04-10, 11:44:19 |
세종이 화랑으로서의 활약한 그의 일대기를 짚어보기 전에 선혜황후의 폐위사건을 먼저 들려다 보자. 선혜는 비처(소지)왕의 후이다. 화랑세기에는 선혜황후가 묘심과 사통하여 오도吾道 라는 딸까지 낳은 기록이 있고(1세 위화랑전), 탈자가 많아서 정확한 해독이 불가능하지만 선혜황후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폐위되어 신궁神宮의 제주祭主가 되었으며 묘심은 법에 따라 주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7세 설화랑전, 8세 문노전). 한편 김춘추의 아버지는 김용춘이다. 김용춘의 어머니 지도태후(남편은 진지왕)는 기오공의 딸이다. 그런데 이 기오공 또한 선혜황후의 사자私子이다, 즉 선혜가 사통을 해서 낳은 아들이다. 비처왕의 왕비인 선혜는 이렇게 남자관계가 복잡하였다. 폐위사건을 비롯한 이러한 그의 사생활의 기록은 화랑세기에는 비교적 구체적으로 전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전혀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전한다. 이른바 ‘사금갑 사건’ 이다. 삼국유사 기이편 제1, 사금갑조에 실려있는 내용을 간추려 보면, <비처왕이 즉위 10년(488년) 정월 보름에 천천정天泉井으로 행차하였는데,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 보시오” 라고 했다. 왕은 기사騎士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하였다. 기사는 남쪽의 피촌避村198) 에서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가 그만 까마귀의 행방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주변만 맴돌고 있을 때, 옆의 연못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기사에게 글을 쓴 봉투를 주었다. 겉봉에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안 열어보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이상히 여겨 그 봉투를 왕에게 바쳤더니,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며 봉투를 열어 읽어 보지도 않으려 했으나, 일관이 ‘두 사람은 보통사람이고, 한 사람은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니 열어 보셔야 합니다’ 하고 아뢰므로 왕이 열어 보니 ‘사금갑射琴匣, 거문고 갑을 쏘아라’ 고 적혀 있었다. 이에 왕이 궁궐로 돌아가 활로 거문고 갑을 쏘자, 거문고 갑 안에 숨어있던 중과 궁주宮主199) 가 튀어 나왔다. 두 사람은 거문고 갑 안에서 왕 몰래 간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그들을 사형에 처했고, 이후 신라에서는 해마다 정월 첫 돼지날, 첫 쥐날, 첫 말날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감히 움직이지 않으며, 특히 정월 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공양하며 제사를 지냈다. 노인이 나타나 서찰을 전해준 못을 서출지書出池라 부르게 되었다.> 비처(소지)왕은 신라의 제21대왕으로 왕후는 선혜였고 아들이 없었다. 나중에 재위 22년(500년)에 날이군(현 영주)으로 순시를 나갔다가 데려온 벽화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두었지만 오히려 이 사건이 빌미를 제공하여 방계의 지도로갈문왕(후에 지증왕, 지도로/지대로/지철로는 지증왕의 이름이다) 계로부터 왕위에서 축출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설화는 신라의 전통적인 토속신앙과 신흥 종교인 불교와의 갈등, 그 신흥 종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왕실과 귀족집단의 대립표현, 또는 비처왕에 반대하는 김씨 왕족의 제거 등, 당시의 종교와 정치세력의 역학구도를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이 중론이다. 그리고 이 사금갑 사건 이후로 우리나라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찰밥(오곡밥, 약밥)을 지어 먹는 풍습이 유래되었다. 그리고 현재 경주 남산 기슭에 위치한 ‘서출지’는 사적 제 138호로 지정되어 전한다. 연못의 둘레가 약 200m 의 규묘로 비교적 아담하고 조용한 연못이다. 산과 물이 어우려지는 경관은 무척 아름답다. 봄에는 벚꽃이 환상적으로 피며, 여름에는 못 전체의 연꽃이 자태를 뽐낸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 현종 5년(1664년)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지었다는 이요당二樂堂이라는 정자는 지금도 사계절 절묘한 주변 경관과 함께 숨쉬고 있다(이요二樂는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智子樂水 – 어진사람은 산을 즐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즐긴다” 에서 따온 말이다. 수려한 산기슭 연못가에 아담하게 지어진 정자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고궁을 바라보며 산책하는 역사기행, 이 보다 더 좋을 수가 어디에 있으랴!). 198) 삼국유사에는 양피사촌壤避寺村으로, 남산 동쪽 산기슭에 있다고 했다. 199) 이 궁주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비처왕은 정비인 선혜왕후를 비롯하여 벽화, 연제, 벽아, 보혜, 준명, 홍수, 보옥, 묘양, 융융 등 많은 후궁들이 있었다. 다만 안정복은 ‘동사강목’ 에서 정비인 선혜부인이라고 하였다. 즉 화랑세기에 나오는 내용과 거의 일치하는 대목이다(화랑세기의 내용은 선혜왕후는 처형되지 않고 신궁에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로 강등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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