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61 |
보스톤코리아 2017-01-16, 11:37:15 |
화랑세기(필사본)에는 19세 풍월주를 역임한 김흠순의 집 구조에 관해서도 조금 언급하고 있다. 이 기록에 보면 김흠순은 젊어서 술고래였다. 그래서 부인 보단낭주는 친히 술을 빚어 다락에다 두고 필요할 때마다 남편에게 바치곤했다. 하지만 김흠순은 그토록 좋아하던 술을 어느날 갑자기 끊었다. 그 연유가 화랑세기(19세 풍월주 흠순공전)에 전하는데 그와 함께 집의 구조도 잠시 살펴 볼 수 있다. 김흠순에 관하여서는 19세 풍월주전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여기서는 그의 저택 구조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공은 젊어서 술을 즐겼다. 낭주가 친히 술을 빚어 다락 위에 두고 드렸다. 하루는 공이 술을 찾자 낭주가 다락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않았다. 공이 이상하게 여겨 다락에 올라가니 큰 뱀이 술독에 들어가 취하여 있었고 낭주는 놀라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공은 이에 낭주을 업고 내려왔다. 마침내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이를 통해 김흠순과 같은 최고 지배계층의 집에는 다락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후일 최고 관직은 시중에 이르렀다. 김흠순이 풍월주가 되기전 18세의 나이에 전방화랑이 되어서 전임 풍월주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녔다. 물론 12세 풍월주를 지낸 보리공도 배알했다. 그 때 보리공의 서녀 보단의 미모에 반해 며칠 뒤 찾아와서 청혼을 했다. 필사본에는 보리공이 조건을 말하기 전 부분에 탈자가 몇 자 있었서 정확한 해독이 불가능하지만, 그의 조건은 “남자가 삼가야 할 것은 색이다. 네가 나의 딸을 사랑하되 다른 여자들을 많이 거느리지 않는다면 곧 줄 수 있고, 그렇지 아니하면 줄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이에 김흠순은 맹세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그러던 중 이 ‘구렁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김흠순은 술을 끊었고 부인도 한 명 더 얻었다. 장인인 보리공이 사위 김흠순이 구렁이 사건 후에 술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처를 사랑함이 이와 같으면 곧 둘째 딸을 주어도 좋다” 라고 하면서 보단낭주의 동생인 이단利丹을 또 김흠순에게 시집 보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딸 셋과 아들 둘을 두었다. 두 자매가 한 지아비를 섬겼지만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또한 김흠순은 집안에 있을 때는 두 부인과 자녀들과 노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그가 삼한의 대영걸이란 걸 가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신라인들은 그를 평하기를 ‘전쟁에 임하면 초목이 모두 떨고 집안에서는 닭과 개가 모두 업신여겼다’ 고 전한다. 김흠순의 죽음에 관하여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이 없다. 김흠순은 김유신의 동생으로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에서 형에 버금가는 전공을 쌓았다. 그에 관한 기록은 형인 김유신 만큼은 못미치지만 기존사서에 많이 전하고 있다(김유신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열전 10권 가운데 3권을 차지한다). 하지만 생몰연대는 나오지 않는다. 화랑세기(필사본)의 출현으로 김흠순의 생몰연대가 확인되었다. 그는 599년에 태어나서 680년2월에 82세(만81세, 문무왕20년)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유신보다 네 살이 어리며 둘 다 장수를 했다. 다음은 그가 죽었을 당시의 직위이다. 분명히 삼국통일전쟁과 나당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당대의 대영걸임은 물론 불세출의 영웅 김유신의 실제, 또한 문무왕비의 친오빠로서 천수를 누린 김흠순의 직책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기존사서에는 없다. 반면 화랑세기를 통해서 그가 죽은해인 680년의 기록을 보면 ‘봄 2월에 이찬 김군관金軍官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기존사서에는 김군관 바로 직전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상대등이 김유신이다. 그는 태종무열왕(김춘추) 7년 봄 정월에 상대등 금강金剛이 죽자 상대등이 되었다. 그런데 김유신은 595년에 태어나서 673년에 죽었다. 그리고 673년 부터 680년 김군관이 임명되는 7년간 상대등이 누구였는지 기록이 없다. 즉 기존사서만 봤을 때는 기록이 없으니까 그냥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화랑세기의 기록을 대입해보면 김유신이 상대등으로 재임하다가 죽고난 673년에 김흠순이 그 자리를 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많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해 김군관이 임명되는 680년은 김흠순이 죽은해이다. 비록 아들 반굴은 황산벌 전투에서 잃고 불세출의 영웅인 형 김유신의 그늘에서 조금은 빛바랬지만 그는 삼국을 통일하고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영걸이었으며 임전무퇴로 다져진 진정한 화랑의 표상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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