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다수 운동 |
보스톤코리아 2016-06-20, 11:39:20 |
"우리의 전쟁은 사탄과의 전쟁, 성전 (Holy War)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바로 사탄이 지배하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도덕적 입지를 회복시켜서 미국이 다시 위대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리 팔웰, 버지니아 린치버그의 토마스 로드 침례교회 설교, 1980년 1월) "미국에는 도덕주의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 변화를 가져오고 미국을 갱생시키기 위해 손에 손을 잡읍시다" (제리 팔웰, 버지니아 린치버그의 토마스 로드 침례교회 설교, 1980년 9월) 제리 팔웰(Jerry Falwell) 목사의 설교는 종교적 메시지를 넘어선다. "미국의 타락"에 분노한 보수적 유권자들과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미국이 다시 위대해지도록 연대하고,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정치적 각성을 주문하는 정치 캠페인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팔웰 목사가 1979년 6월 결성한 <도덕적 다수>는 바로 보수-기독교 우익의 정치적 전위조직이었다. 팔웰은 "나는 미국을 사랑합니다(I love America)"라는 수사를 통해 미국의 보수적, 기독교적 가치를 회복할 것을 역설하고 다녔다. 팔웰 목사가 1970년대 초반 설립한 리버티 대학교 역시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적인 대학 교육에 맞서 기독교 근본주의를 교육하기 위한 사명으로 시작되었다. 정치적 보수주의와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범주가 다르다. 도덕적 다수 운동을 지지하지 않는 기독교 세력도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왜 <도덕적 다수>는 왜 보수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연대를 주문했을까? 1960년대에서 1970년대는 진보적인 혹은 자유주의적인 세력의 발언권이 성장한 시기였다. 흑인 민권운동과, 여성운동을 비롯한 여러 마이너리티의 사회 운동이 활발했다. 학생운동이 등장했고, 베트남전을 비판하는 반전 운동도 있었다. 이런 흐름에 대해 1969년 닉슨은 적극적으로 의사 개진을 하지 않을 뿐, 숫자로는 다수인 보수층, 즉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의 지지를 호소하면서 사회의 진보적 변화와 반전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세력을 시끄러운 소수(vocal minority)로 만들어버렸다. 1970년대 말부터 "시끄러운 소수"에 대항하는 보수층의 결집에 기독교 근본주의가 합세하게 된 데에는 몇가지 대법원 판결의 역할이 크다. 1962년 대법원의 Engle v. Vitale 판결은 공립학교에서 '기도'하는 것을 금지했다. 수정헌법 1조에 명시된 정교 분리의 원칙때문이었다. 1973년 Roe v. Wade 판결에서는 낙태를 처벌하는 법률들이 수정헌법 14조에서 보장하는 사생활에 대한 권리를 침해한다고 결론 내렸다. 도덕적 다수의 지도자들은 이런 일련의 변화들이 일상 생활과 정치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를 전복시키고 있다고 우려하였다. 아니, 분노했다. 당시 이미 근본주의 기독교계에서는 교육에 종교가 개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개진되고 있었다. 1970년대 헨리 모리스가 설립한 미국 창조 과학회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의 영향으로, 1970년 대 말 남부의 아칸사소와 루이지애나 등에서는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려면 창조론도 함께 가르치는 것이 평등하다는 취지를 가진 동등시간법 운동이 벌어졌다. (1987년 대법원은 창조과학이 종교이기때문에 창조과학의 교육을 위한 동등시간법은 위헌이라 판결하였다.) 창조론 교육 캠페인은 1970년대 기독교의 '위기의식'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라 하겠다. 미국이 "아메리카 합중국"의 이름을 얻기 전부터, 사회적 위기의 시기마다 종교 대각성 운동은 몇 차례 있었다. 1740년대 당시 기독교 내부의 지나친 형식주의와 메마른 합리주의를 비판하는 1차 종교대각성 운동은 결과적으로 식민지의 민주주의 확대에 기여하게 되었다. 1790년대에서 1830년대까지의 2차 종교 대각성 운동은 남북전쟁 이전 시기의 노예해방론의 확산과 여성의 사회 참여 등에 산파 역할을 하였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도덕적 다수 운동의 활발한 활약은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이 당선되도록 기여했다. <도덕적 다수>가 레이건을 선택했던 데에는(과거 그들이 지지했던)남부 출신 독실한 크리스찬(침례교도)인 지미 카터에 대한 배신감도 적지 않았다. 가령 <도덕적 다수>의 지도자들은 카터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캠프 데이비드 평화 협정을 중재한 일이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레이건 당선 이후 미국 문화 속에 공화당-보수주의-기독교 근본주의의 삼각 동맹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2000년과 2004년 부시 대통령의 당선 역시 이 삼각 동맹에 빚졌다. 한편 20세기 후반 매체의 발달은 유명 목회자들이 텔레비전, 출판, 인터넷 등을 통해 활약하는 일명 "텔레반젤리즘 (Television + Evangelism)"의 유행을 낳았는데, 도덕적 다수의 메시지는 이런 미디어 덕분에 더욱 활발하게 유포되기도 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를 거쳐 기독교 우파의 정치적 영향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팔웰 목사의 메시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훨씬 강경해졌다. 그는 2001년 9·11 테러 직후, 현재 미국의 문제를 만든 것은 바로 "이교도와, 낙태 찬성론자, 페미니스트, 대안적 삶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게이와 레즈비언들, 미국 시민 자유 연합 (ACLU) 등 미국을 세속화한 모든 이들"이라고 발언하여 비판받았다. <도덕적 다수>운동은 보수-기독교 우파의 연대를 만드는 데도, 그들을 정치화 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오늘날 공화당 지지자의 3-40%는 기독교 근본주의 그룹이다. 그리하여 미국사회는 좀 더 혹은 도덕적으로 혹은 기독윤리에 입각하여 사회의 병폐와 싸우고 있을까? 혹시,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소수자 혐오를 뿌리내린 것은 아닐까? 종교적 성찰이 필요한 순간이다. 보스톤코리아 칼럼리스트 소피아 소피아 선생님의 지난 칼럼은 mywiseprep.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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